#34. 주파수가 맞는 친구.

스마트폰부터 흑백 TV까지 아우르는 모임

by LindAra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왔다.

그 흔하다는 '먼 친척' 조차 없는 정말 우리 네 식구가 끝이었다.

그런 내가 비교적 덜 외롭게 지낼 수 있었던 데에는

내 '크루' 역할이 컸다.


회사를 가지 않으니 주기적으로 만나서 공통 관심사에 대해 대화할 성인을 만나기 쉽지 않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어로 말하고 싶었고,

성인과 대화하고 싶었고.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주기적으로 가는 장소.

즉, 학교에서 매일 아침과 오후, 등하교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봤다.

그 멤버가 좀처럼 변하지 않았고,

다행히 그중 두 명은 우리 둘째랑 같은 반 엄마였다.


'좋았어, 저기다.'


아이들 학교 보낸 지 3일 즈음 됐을 무렵부터 쭈뼛쭈뼛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 나 ㅇㅇ이 엄마고, 얼마 전에 이사 왔어.'


그렇게 나의 크루가 형성됐다.

사실 나를 제외한 크리스, 티파니, 타미, 에리카, 말리스, 리마, 사라는 서로 띄엄띄엄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TK, 즉 만 4세부터 이 학교에 아이들을 보낸 학부모들이라 오며 가며 얼굴을 봤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 크루가 된 건 다행히도 내가 합류한 이후였다.


공통분모이자 관심사 = 아이들과 학교

성인, 영어 사용.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아이 둘 스케줄이 달라 갑자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을 때 봐달라고 부탁할 친구.

주말에 아무 스케줄 없이 애들이 심심해하면 플레이 데이트할 수 있는 친구.

인종도 다양해서 인도 명절에 인도 친구네 집에 모여서 명절 보내기.

할로윈 파티 같이 하기 등.


게다가 주파수가 맞는 친구들이라 월에 1회 정도 브런치를 하기도 하고,

또 멤버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추가적인 브런치를 기획하기도 한다.


나이도 다양한데, 가장 늙은(내가 맨날 넌 흑백 TV 보고 자랐니?라고 놀리는) 친구인 크리스는 69년 생이다.

우리 아빠가 63년 생이라는 걸 감안하면... 크리스는 뭐 작은 아빠 뻘?

근데 막상 나랑 가장 잘 통한다.

전형적인 남부 출신(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 백인이며, 미국인 특유의 sarcasm이 풍부한 친구다.


타미는 대만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민 와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과 내 마음을 다 이해하는 친구.

티파니는 심리 상담사를 하던 친구라 이 친구랑 이야기하면 뭔가 술술 다 내뱉어진다.

리마는 뉴질랜드에서 자란 인도계 친구인데, 어린이집에서 일해서 아이들을 정말 잘 다룬다.

말리스는 전직 미용사 출신으로 아들 둘을 키우는데 정말 에너지가 넘친다.

마지막으로 사라는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들을 키우고, 남편은 male과 female로 gender를 나누기를 거부하는 그런 가족의 중심인 친구다.


우리의 대화 주제도 정말 다양한데,

주로 아이들과 학교가 주를 이루지만,

갱년기, PMS, sex life, 어제 읽은 책, 현재 집필하고 있는 책(티파니는 필명으로 책을 출간하는데 필명을 절대 안 알려준다) 등 온갖 이야기들이 널을 뛴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 있는 오랜 친구들과도 나누지 않는 이야기들을 이 크루와 더 편하게 이야기한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민망한 주제들이지만 여기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주제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다.


아, 심지어 엄마가 가장 멀리 사는 내가 어느 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다가 학교에 간 적이 있는데,

내 빨간 눈을 보고 그 뒤로는 친구들이 서로 부모님이 방문할 때마다 자신들의 엄마에게 나를 소개하며


'go, give her a mom-hug'라고 free hug를 해준다.



그렇게 흑백 TV 시대를 살았던 크리스부터 가장 어린 나까지

모두가 서로의 주파수에 맞는 이 크루가 있어 참 다행이다 나는.

인복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