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5월이 꽤 남았는데 벌써부터 공기에 물기가 한가득 느껴진다. 아직 봄옷을 하나씩 다 입어보지도 못한 것 같은데, 출근을 위해 옷장에서 옷을 고를 때면 자꾸만 얇고 시원한 반팔 티셔츠에 눈길이 간다. 아직 안되는데... 봄이 좀 더 오래 버텨줘야 새해에 담아두었던 마음들의 수명이 좀 더 길어질 텐데, 자꾸만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온도와 습도가 벌써부터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
나의 작고 낡은 보금자리는 소형 아파트 1층이다. 1층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아파트가 오래되어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해가 짱짱하게 드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습도가 꽤 높은 편이다. 습도계의 수치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면 맨발로 디디는 장판이 끈적하게 느껴지고, 집안의 전선을 정리하기 위해 벽이나 천장에 붙인 일명 ‘쫄대’라고 부르는 전선몰딩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 여름이 코앞까지 왔구나’ 느끼는 것이다. 봄과 겨울에도 우리 집의 습도는 보통수치를 살짝 웃돌기 때문에 모두가 건조하다고 말하는 계절이라고 해서 가습기를 틀었다가는 온 집안이 곰팡이 천국이 될지도 모른다. 곰팡이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는 예전에 동생과 함께 살았던 원룸에서 뼈저리게 느껴봤기 때문에 집에 습도가 높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제습기를 구매했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온 집안의 창문을 열어 10분 정도 환기를 시킨다. 환기만 잘해줘도 곰팡이가 덜 생기고, 실내 습도를 한결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집 안의 케케묵은 내부 공기를 내보내고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는 이 일을 마치 의식처럼 하고 있다. 사실 바깥공기가 더 신선할지는 의문이긴 하다. 특히나 봄에는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어쩌면 환기를 하지 않는 것이 더 건강에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봄은 너무도 짧고, 계속 더 짧아지고 있기에 봄이 가진 안 좋은 점도 모두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랄까. 노란 송화가루가 섞여서 코를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공기마저도 아련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훌쩍거리면서도 꼭 창문을 열어두고는 ‘내년에는 공기청정기도 하나 살까’ 생각하는 것이다.
여름철의 환기는 사실 딱히 의미가 없다. 실내습도를 떨어뜨리기 위한 목적의 환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창문을 여는 순간 끈끈한 바깥의 습기가 들어와 오히려 내부습도를 더 높이기도 하고, 더운 바람이 훅 밀려들어오면 내 불쾌지수도 덩달아 훅 올라가 버리니까. 특히나 여름의 공기는 무겁게 머물러 있어서 바람조차 잘 불지 않아 환기라는 말이 무색하기도 하다. 그래도 세차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가끔 창문을 열어두고 빗소리를 듣거나 비릿한 비냄새를 맡으면서 얼음을 가득 담은 커피나 차가운 참외 하나를 깎아먹곤 한다.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척척 달라붙고, 땀이 날아가지 못해서 주르륵 흐르는 여름은 정말 너무도 힘들지만, 언젠가 퇴근 후 습관처럼 창문을 열었을 때 공기에서 아주 약간의 찬기운을 느끼게 되는 순간, 이제껏 겪었던 여름의 모든 힘든 기억은 아름답게 미화되어 버린다. 마치 ‘여름이었다’라는 한 문장으로 모든 여름의 기억들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만 같달까. 그리고는 진정한 완숙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가을을 맞이하는 것이다.
가을의 환기는 진정한 의미의 환기라고 볼 수 있다. 퀴퀴한 내부 공기를 내보내고 가을의 정취가 담긴 공기를 들이면 보잘것없는 나의 방에도 한 줌의 낭만이 머무르는 것 같다. 평소엔 입지 않던 옷을 괜히 뒤적여 몸에 갖다 대보기도 하고, 신지 않던 구두를 꺼내 슬그머니 발을 넣어보기도 하는 계절. 가을 하늘의 파랑이 들어와 긴 여름의 땀을 식혀주고, 어느덧 낙엽이 타는듯한 쿰쿰한 냄새가 코끝에 머무르면 슬슬 도톰한 이불을 꺼낼 생각을 하게 되는 시기. 가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9월이 되면 괜히 마음이 설렌다. 봄의 설렘과는 다른 느낌의 설렘이다. 봄이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하는 설렘이라면 가을은 ‘이제야 한숨 돌리는구나’하는 안도감과 곧 또다시 한 해를 보낼 준비를 해야 하는 아쉬움을 동반한 설렘이라고 할까. 아니 어쩌면 내가 9월에 태어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다른 계절에 하는 환기는 창문을 열기 전에 살짝 멈칫하게 되는데, 가을에 하는 환기는 주저함이 없다. 일단 집에 들어오면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부랴부랴 창문부터 열어서 조금이라도 더 신선한 가을의 공기를 들이켜곤 하니까.
반면 가장 창문열기를 주저하는 계절은 겨울이 아닐까? 큰마음먹고 창문을 여는 순간 날카롭고 뾰족한 바람이 사정없이 나를 찔러대고 겨울을 나기 위해 집안으로 들인 식물들에게마저 그 칼끝을 겨눠 몇몇은 겨울을 버티지 못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날카로운 바람이 집안을 구석구석 해집어 놓는 바람에 환기 후 창문을 꼭꼭 닫고 나면 한결 집안이 신선해지고 깨끗해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실 다른 계절의 환기보다 겨울의 환기가 가장 중요한데, 결로현상으로 곰팡이가 생기기 아주 쉬운 계절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그걸 몰라서 춥다는 이유로 창문을 꼭꼭 닫아놨었는데 그것 때문에 이사하면서 새로 바른 벽지들이 군데군데 얼룩져있는 걸 보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매일 의식처럼 다소 경건한 마음으로 환기를 시키는 일은 물론 곰팡이와 결로현상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장 큰 이유지만, 바람이 들어와 해묵은 공기를 거둬가면서 덩달아 내 마음속 해묵은 감정들도 조금은 정리가 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일 규칙적으로 샤워만 해도 우울감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내가 매일 하고 있는 환기도 그와 비슷한 느낌의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와 내 주변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졌을 때 다가오는 만족감과 뿌듯함이 며칠이라도,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에 환기를 준다면, 그래서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해볼 만하지 않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극복되지 않는 무력감이 찾아와 창문을 열 힘도 없을 때면 가만히 누워 음식을 떠올려본다. 그러다 보면 허기가 지고, 내가 지금 가장 빠르고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역시나 답은 라면이다. 냄비에 라면 물을 올리기만 하면 딱 오늘치의 무기력은 극복하는 거라고 나를 독려하면서 몸을 일으켜 라면을 끓여 먹고 나면, 역시 그다음 행동은 환기다. 집안을 가득 채운 라면냄새를 거두고, 지금 바깥에서 오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계절을 집안으로 들여보는 것. 그러고 나면 꼬질꼬질한 얼굴을 씻고 싶어지고, 씻고 나서 말갛게 바뀐 거울 속 얼굴을 보면 그다음에 또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아직은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한가득 들어온다.
곧 끈적한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온 집안을 눅눅하게 만들 여름이 찾아오겠지만,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찾아 길고 지루한 여름을 잘 보낼 것이라고 믿는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바로 침대로 쓰러져 잠들고만 싶던 하루의 끝에도 어떻게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싶은 마음처럼, 이 환기가 나를 한결 더 낫게 해 주리라는 믿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