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

by 린다

종종 사람들은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감정의 파고가 크지 않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래의 나는 감정의 파고가 큰 편인 것 같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차분해 보일 뿐, 마음속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이 나기도 하고, 조금의 여지도 없이 차갑게 얼어붙기도 한다. 마음속에서 화르르 불길이 일 때면 어떻게든 빠른 시간 안에 불길을 잡고자 하는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수습을 하고, 어느샌가 딱딱하고 차가워진 마음을 알아챌 때면 ‘이러지 말자’고 다짐하는 내가 나타난다. 이렇게 바쁘게 감정을 컨트롤하고자 하는 이유는 한 가지일 것이다.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가능할 리 없겠지만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해서.


나처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농도와 세기를 조절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의 파고로 인해 누군가에게 감정의 파고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하지만 잘못 억눌린 감정은 종종 아주 약한 자극에 예상 없이 터져버려서 수습이 어려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이 쌓여있을 때 다른 방법으로 조금씩 해소를 해줘야 하는데, 내게는 그것이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것이고, 드라마나 영화들로 다른 세상을 경험해 보는 것, 그리고 운동을 통해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 감정을 조절해서 잔잔하게 만들려는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예민하다는 말에 대해 오랜 시간 오해를 해왔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말을 마치 비난이나 험담으로 여기고 사용해 왔다. 실제로 예민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불편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한 사람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도 예전에 종종 성향검사 같은 것을 할 때면 꽤 예민한 편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때는 내가 예민하다는 자각이 없어서 세상 모든 것들이 불편하게만 느껴지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점차 어른이 되어 갈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면서 나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내게 불편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편감이 때로는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도. 그것을 알게 된 후로는 마음속으로 감정들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이기적이라고 판단되는 불편함은 참아왔고, 또 그렇게 하다 보니 실제로 불편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종종 본인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가감 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본인들을 ‘섬세한 사람’ 혹은 ‘솔직한 사람’이라고 칭하면서(이럴 땐 꼭 예민하다는 표현보다는 섬세하다는 표현을 쓴다) 본인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것들을 참지 않고 지적한다. 아마도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예민하다는 말에 깊은 오해가 생겼던 것 같다. 지금은 그처럼 자기감정을 컨트롤하려 하지 않고 그때그때 주변사람들에게 표출해 불편함을 만드는 사람들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칭하지 않는다. 대신 ‘무례한 사람’이라고 혼자 정의하고 있다. 예민한 것은 그저 성향일 뿐이고, 예민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장녀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참을성이나 인내심 같은 것들을 본의 아니게 키워온 경우가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장녀라서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없을 땐 네가 엄마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부모님의 시선 아래에서 동생들과 놀 때는 영락없이 철딱서니 없는 아이가 되어 놀았지만, 부모님이 자리를 비우는 순간, 나는 마치 미어캣처럼 주변을 경계하고 동생들을 시선에서 놓지 않으려 노력하는 ‘엄마인척’에 집중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어쩌면 내 감정의 파고를 조절하고자 하는 자아는 장녀로 살면서 더 강해진지도 모르겠다. 사실 장녀라는 무게가 무겁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장녀로 태어난 덕분에, 책임감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게 된 덕분에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었고, 나를 더 잘 다룰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 같은 성격이 장녀로 태어나지 않았고, 짊어질 무게마저 없었다면 여전히 천둥벌거숭이처럼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니거나 참을성 없는 감정표출로 인간관계 또한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은 나도 자신을 ‘섬세한 사람’이나 ‘솔직한 사람’이라 칭하며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싶을 때가. 화가 날 때는 마음껏 짜증 내고 싶고, 칭얼거리고 싶고, 웃음이 날 때면 분위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깔깔 웃고 싶을 때가.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러고자 하면 어김없이 어떤 순간이 찾아온다. 마음껏 짜증 낼 수 없는 순간, 칭얼거릴 수 없는 순간, 도저히 웃을 수가 없는 순간. 그러면 ‘아차!’하며 깨닫는 것이다. 맞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

지난날 내가 후회하던 모든 기억들엔 내가 잠시 다르게 살고 싶어서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했던 마음들이 끼어있었다. 충분히 참을 수 있는 분노였는데, 무례한 상대방의 무드에 맞춰주겠다고 같이 무례한 언행을 했던 순간이나 솔직하다는 말을 앞세워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나도 참지 못하고 같이 깎아내리는 말을 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치졸하기 짝이 없고, 정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만 있다면 당장 가서 그 입을 틀어막고만 싶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 이후엔 반드시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음껏 화내거나 짜증 낼 수가 없는 순간들이 곧바로 찾아오곤 했다. 괴로운 마음을 누군가에게 맘껏 표출하며 투정 부리고 싶었는데 그 사람에게 더 괴로운 일이 생겨버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마치 세상이 내게 경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곤 이내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순간들이 찾아올까? 내가 했던 언행들을 채 몇 시간도 못지나 후회할 순간들이 마치 경고처럼 다가올까?


나는 그 경고들이 무섭고, 무서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감정을 조절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런 내 모습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대로 잘 안돼서 불안정한 정서를 보일 때가 있고, 무조건 억누르다 보면 정작 표현해야 할 때에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부작용 또한 있다. 그래서 요즘은 적절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고마운 순간에 마음을 다해 고맙다고 말하는 것들. 유난하고 소란스럽지 않게, 다만 진심을 다해 좋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 내가 닿고자 하는 모습이란 이런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려 하지 않는 사람. 갑작스러운 분노나 스트레스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사람. 하지만 좋아하는 것 앞에서는 온 마음을 다 쏟는 사람. 지금부터 노력해서 언젠가 이런 사람이 된다면 나는 아마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만큼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되어야지.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해서,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 감정의 파도에 올라타있는 젊은이(?)들이 찾아와 안정과 위안을 얻고 갈 수 있는 그런 멋진 할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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