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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Aug 28. 2024

살생부


나는 일기를 쓰는 것이 내 감정의 이름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거짓말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일기로 마음을 다스리며 몸으로 체득한 결과임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일기가 온갖 깨달음과 감정에 대한 묘사와 다짐과 희망 등등.. 이런 것들만으로 가득하다는 것도 절대 아니다. 일기를 통해 내 감정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결과적인 말이고, 실제 내 일기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노를 가득 담은 필압으로 꾹꾹 눌러쓴 일종의 살생부와 다를 바 없다.


‘이쯤 되면 나는 세상의 온갖 인간 군상은 다 봤다’라며 오만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서른을 목전에 둔 스물아홉 살의 일이다. 스물다섯에 첫 직장을 들어가 스물아홉에 퇴사하기까지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났다. 왜 빌런들은 해치우면 또 생기고, 해치우면 또다시 생겨나는 건지. 무슨 게임도 아니고 도장 깨기도 아니고. 우여곡절 끝에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면 어김없이 새로운 빌런이 등장하곤 했다. 그래도 내 능력껏 빌런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도라면 할만했다. 빌런들을 해치울수록 내 능력치가 커지고 보다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단단한 갑옷이 한 겹 더 생긴 느낌이었으니까.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며 만난 끝판왕 최종빌런은 다름 아닌 내가 몸담은 이 조직, 이 회사의 오너였다. 내가 무슨 수로 오너를 물리친단 말인가.

그때 알 수 있었다. 이 회사에서 난 여기 까지겠구나.


그렇게 나름 각종 빌런들을 만나며 치열하게 싸워왔으니 이제 웬만한 종류의 인간들은 다 상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퇴사 후 직업을 바꿔 바리스타로 일하며 만날 수 있는 진상손님 정도야 그동안 만나온 빌런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일 거라고. 역시 난 오만했다. 귀엽게만 생각했던 빌런들은 꽤 다른 종류의 분노를 선사해 주었다. 이전 회사에서 만난 빌런들이 교묘하고 교활하고 비열한 타입이었다면, 서비스직으로서 만난 빌런들은 그냥 막무가내였다. 대한민국에 안되는 것이 어딨 느냐며 메뉴판에도 없는 메뉴를 무작정 만들어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금연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벌금 내줄 테니 걱정 말라며 개의치 않고 계속 뻑뻑 피워대는 흡연자들, 이 카페에 본인이 쓴 커피값이 얼마인 줄은 아느냐며 커피 한잔 값으로 호텔급 서비스를 요구하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일상에서 빌런들을 만날 때마다 성질껏 화를 낼 수 없으니 하루치의 분노를 잘 모아뒀다가 일기장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렇게 응축된 공개할 수 없는 분노의 글들이 비공개 게시물이나 노트에 휘갈겨 쓴 글씨로 존재하고 있다.


바리스타의 삶에서 만나는 빌런이 진상손님만 있다면 어쩌면 그것 또한 행운이다. 카페 역시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마음이 맞지 않으면 참 고역이기 때문이다. 파벌이나 사내정치질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조직에서나 생기는 건 줄 알았는데, 동네 작은 카페나 대형 프랜차이즈나 관계없이 두세 명 이상 모여 일을 하면 어김없이 편나누기가 생긴다. 일을 잘하면 잘하는 데로 외톨이가 되고, 일을 못하면 못하는 데로 공공의 적이 된다. 상하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사를 다닐 때는 실컷 갑질을 해놓고 돈으로 입막음을 하는 편이었다면, 여기서는 어떻게든 돈을 적게 주고 다양하게 부려먹으려는 속셈이 눈에 보인다. 이쯤 되니 조직생활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내 일기장에 다시는 볼 일없는 진상손님에 대한 분노만 적혀 있다면, 어쩌면 나중에 들여다봤을 때 웃어넘길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험담이나 상사에 대한 불만, 또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의 불편함 같은 것들도 모두 적혀 있는 이상 내 일기장들은 죽기 전에 반드시 내 손으로 처리를 하고 가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고 있다.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 와 책장을 들여다볼 때면 내가 한눈판 사이에 일기장을 들춰보진 않을까 걱정돼서 (물론 내가 집에 초대까지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남의 일기장을 함부로 들춰보는 무례한 일은 하지 않을 사람이지만) 자꾸 흘깃흘깃하며 그 사람을 내 시야 안에 두려고 하고, 나도 모르게 다른 책들과 함께 가방에 넣고 외출했다가 바깥에서 잃어버리게 되진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살생부와 같은 일기를 그냥 안 쓰는 게 낫지 않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나의 이 분노를 내 곁의 내 사람들에게 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종류의 분노는 같이 있는 사람과 함께 욕을 하거나 또는 험담을 하며 푸는 것이 아주 제맛일 때가 있다. 누군가 나의 상황에 대해 공감해 주고 토닥토닥해주는 것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효과 있는 스트레스 치료제가 아닐까. 그 때문에 회사를 다닐 땐 하루가 멀다 하고 퇴근 후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으니. 하지만 주변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일도 한두 번이지 매번 화가 날 때마다가 이 일과 아무 관계도 없는 친구를 붙잡고 쏟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좋은 이야기도 계속하면 듣기 싫은 때가 오는 법인데, 하물며 부정적인 말들로 가득한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나라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매일 하루치의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둔 후 오이지를 담글 때처럼 무거운 돌 하나를 올려 눌러둔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가 살며시 눌러둔 돌을 내려놓고 일기장에 검은 감정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꼭 누군가에게 푸념하듯 말하지 않아도 살생부 같은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처음 새 일기장을 살 때는 예쁘고 평화롭게만 보였던 노트 표지의 사진이나 일러스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모르게 어둡게 느껴진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리고 요즘은 나도 타인을 향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는지 하루치 분노의 양이 예전에 비해 많이 적어졌다. 어쩌면 그보단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진 것일지도. 언젠가 내 일기장이 더 이상 살생부처럼 선뜩한 기운이 아니라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로만 채워질 날이 올까? 그래서 노트 표지의 사진과 그림이 오랫동안 아름답게만 느껴질 날이. 그때쯤 되면 ‘아무것도 못하면서 해맑기만 하다’라는 식의 내용으로 누군가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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