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린다 Sep 04. 2024

제철


나는 지금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삼십 년을 넘게 살아온 덕에 계절의 뚜렷함이 낯설진 않다. 하지만 계절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실감하고 나면 그것은 곧 그 계절이 물러날 시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간이 더욱 빠르게 느껴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가는 주변 풍경을 자각하자마자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 그것이 잔뜩 들어가 있는 단어가 내게는 ‘제철’이다. 

서른일곱의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 윤택한 삶, 질 좋은 삶이란 바로 ‘제철’을 즐길 수 있는 삶이다. 그리고 이런 결론은 내가 지금 제철을 즐기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정의 내린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제철을 즐기지 못한 채 어느새 바뀌어버린 계절에 탄식을 내뱉으며 살고 있을 테다. 


어렸을 때는 정말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었다(물론 지금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도 생각했다(물론 지금도 아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지금의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 모아둔 재산이 있어서 더 이상 돈이 아닌 다른 삶의 가치를 쫒으며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더 이상 돈에 구애받지 않고, 내 삶의 질을 더 윤택하게 하는 뱡향으로 살게 될 거라고.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여전히 계속 돈을 좇고 있고 또 돈에 쫓기며 살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통장잔고를 보면 슬그머니 달력으로 눈을 돌려 월급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 보는, 굉장히 돈의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확실히 제철을 즐기는 것과는 꽤 거리가 먼 삶이다.


우리나라의 휴가철은 대부분 7말 8초라고 한다. 꿉꿉했던 긴 장마가 끝나는 7월 말에서 8월 초가 되면 휴가지로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 시기에 도심에 있다 보면 때때로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북적거리는 계곡과 바다, 숙소와 비행기 예약 전쟁, 성수기 관광지의 말도 안 되는 물가, 볕에 그을린 피부, 휴가지에서 먹는 바비큐... 그야말로 휴가철 바캉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나는 이런 제철 바캉스를 가져본지가 꽤 오래되었다. 공휴일, 주말, 연휴, 휴가 이런 단어들과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정반대로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져서 휴가철은 물론이고 휴가철이 아닌 날에도 3일 이상은 연속으로 쉴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정이 나아질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어째 이 직업에 오래 종사할수록 쉬는 날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은 그냥 기분 탓인 걸까?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북적이는 인파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오히려 초록이 많고 시야가 탁 트인 한적한 곳을 더 좋아하는 나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휴가생각으로 들떠있을 때 나 혼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여름 내내 도심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든다. 누구에게 서운한 건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휴가를 갈 때 함께 갈 수 있는 ‘제철 휴가’를 즐기는 삶, 꼭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우르르 가지 않더라도 남들이 쉴 때 나 역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제철의 삶을 나는 언제나 꿈꾼다. 


몇 년 동안 봄이 되면 ‘도다리쑥국’을 먹겠다는 다짐을 했던 적이 있다. 사실 도다리가 어떤 물고기인지도 모르면서 도다리와 쑥이 봄이 제철이라 딱 그때만 먹을 수 있다는 도다리쑥국을 막연하게 봄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몇 번의 봄을 그냥 흘려보냈고, 나는 점점 더 쫓기듯 살았다. 20년 지기인 동그라미와는 함께 여행 갈 때 쓰기로 하고 매달 모으고 있는 돈이 있다. 하지만 둘이 같이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통장에 차곡차곡 돈만 쌓여가고 있던 어느 날, 이렇게 모으기만 할 수는 없다며 생각난 김에 얼른 날짜를 픽스하고 여행 계획을 세우자고 의기투합을 했다. 그때 문득 나의 봄 목표가 떠올랐고, 그러면 봄맞이 도다리쑥국 여행을 떠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여행지는 ‘여수’였다. 그렇게 여수에서 맛본 도다리쑥국의 맛은 여전히 꿈같은 맛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으로도 본 적 없이 막연히 봄에 먹겠다는 의지를 품었던 제철 도다리쑥국은 이런 맛이었구나. 


동그라미가 찾아낸 여수의 도다리쑥국 맛집은 조금만 늦었다면 한참이나 줄을 서야만 하는 식당이었는데, 아침잠이 많은 나를 동그라미가 일으켜 욕실로 밀어 넣은 덕에 일찌감치 도착해 웨이팅 없이 한 번에 입장할 수 있었다. 정말 심심하게 생긴 이 비주얼이 제철 봄에만 먹을 수 있는 그 도다리 쑥국이 맞는지 처음엔 약간의 의심마저 들었지만, 숟가락으로 떠서 한입 밀어 넣은 도다리 쑥국은 마치 명탐정 코난이 ‘범인은 그 사람이야!’라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머리를 뚫고 섬광이 지나가는 장면처럼 두 눈을 번뜩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마주 앉은 동그라미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며 말 한마디 없이 도다리쑥국을 해치웠다. 그때 이후로 도다리쑥국을 먹었던 봄은 더 이상 내게 없었지만, 봄이 되면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도다리쑥국 먹어봤어? 지금이 제철인데!’ 하며 먹어본 자가 가질 수 있는 너스레를 떨곤 한다. 도다리 쑥국을 제철에 먹어본 경험이 ‘제철음식 좀 먹을 줄 아는 사람’의 의기양양한 파워숄더를 선물해 준 셈이다. 


봄에는 제철 도다리쑥국을 먹고, 여름엔 더위를 피해 바캉스를 떠나고, 가을엔 알록달록 단풍을 구경하고, 겨울엔 붕어빵 같은 겨울간식을 찾아먹는 제철의 일상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겨울이 다 끝나고 나서야 ‘이번엔 붕어빵 한 번을 못 사 먹었네’ 하며 후회하지 않고, 예쁜 단풍잎이 모두 낙엽으로 바스러지기 전에 다시 오지 않을 올해의 가을을 즐길 줄 알고, 남쪽에 벚꽃이 필 거라는 소식을 들으면 어김없이 도다리쑥국을 떠올리며 챙겨 먹을 줄 아는 사람. 이렇게 제철을 즐기는 삶을 추구하는 나 역시 항상 뒤늦게 계절을 만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이제부터라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와중에 제철을 잊지 않고 때에 맞는 먹거리와 즐길거리를 챙겨 그 소중함을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올해도 여름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7월이 될 때까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아파트 단지로 차를 몰고 들어서는데 몇몇의 어린이들이 각자 가진 자전거를 끌며 단지를 신나게 돌고 있었다. 조금 큰 어린이는 두 발자전거를, 그보다 어린아이는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가장 작은 아이는 조그마한 세발자전거를 타고 꺄르륵 꺄르륵 천진한 웃음소리를 내며 놀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이마에는 앞머리를 흠씬 적실정도로 땀이 났는데, 땀으로 젖은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보자 그제야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실감했다. 땀나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나게 노는 어린이들에겐 앞으로 긴 여름방학이 기다리고 있겠구나. 여름이 되면 더위에 지쳐 축 늘어지는 나 같은 어른과는 달리 흘리는 땀만큼이나 넘쳐나는 에너지로 여름을 보낼 어린이들을 보며 나의 여름은 얼마 나의 땀과 얼마 나의 설렘으로 채워질까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신나는 바캉스의 설렘도 건실한 노동의 설렘도 없을 내 여름.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다른 제철설렘을 찾아 남은 내 여름을 채워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