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책을 직접 만드는 일은 또 다른 느낌이다. 읽을 줄만 알았지 내가 책을 만든다는 것은 평소에 쉽게 할 만한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전문적이진 않지만 더듬더듬 배운 인디자인으로 종종 개인책자 작업을 하고 있다. 자신만의 이야기로 채워나간 원고를 받아 읽어보고, 표지의 분위기를 어떻게 디자인할지, 폰트와 크기는 어떻게 잡을지도 고민해 보는 시간은 어렵지만 꽤 재미있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작업기간이 매우 여유로운 편은 아니어서 표지 디자인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 열과 성을 다하기는 어렵다. 마음 같아서는 다양한 종이에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보고 샘플도 만들어보고 하고 싶지만, 정해진 예산이 있으니 항상 비슷한 종이와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만들게 될 수밖에 없고, 표지뿐만 아니라 내지 작업도 해야 하니 사실은 매우 촉박한 작업이다. 그래도 의뢰주신 분들이 꽤 만족스러워하시는 경우가 많아 나도 참 뿌듯한 작업 중 하나다. 아쉬운 건 여러 번 개인책자 작업을 했지만 한 번도 만든 책을 실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업체에 제작을 맡긴 후 바로 의뢰인에게 택배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완성된 책의 실물을 살펴보고 이번 작업에서의 아쉬운 점이나 다음번에는 다르게 해 봐야겠다는 식의 리뷰가 불가능했다. 받아보신 분들이 사진을 예쁘게 찍어서 보내주시는 경우 사진을 확대하고 확대해서 어렴풋이 확인해 보는 것이 최선일뿐.
누군가의 개인책자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언젠가 나의 책도 만드는 날을 상상해보곤 한다. 책 안에 어떤 글이 들어가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어서 표지를 어떤 이미지로 채울지, 책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지 역시 미리 생각해 볼 수 없지만, 종종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만나는 책들 중에서 멋진 색감이나 독특한 구성을 가진 책을 만나면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슥슥 종이의 질감을 느껴보기도 한다.
‘하필 책이 좋아서’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하필 책이 좋아서 출판업계에서 일하게 된 소설가와 북디자이너, 그리고 홍보기획자가 쓴 에세이가 묶여있는 책이었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북디자이너도 아니고,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하필 책을 좋아하는 바람에 이렇게 브런치에 끄적끄적 글을 쓰기도 하고, 누군가의 개인책자를 만들기도 하기에 이 책의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잘 모르는 출판업계에 대한 내용이나 전문 북디자이너의 생각 등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가와 북디자이너, 홍보기획자의 글이 각각 다른 폰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슥슥 쓸어보다가 만약 내게 예산의 한정이나 시간의 한정이 없이 마음에 드는 쪽으로만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상상해 봤다. 먼저 비루한 나의 글만으로는 책 한 권을 채우기에 역부족일 테니 함께 글을 쓸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 같다. 한 권의 책으로 묶여야 할 테니 서로 결이 맞는 사람들이라면 좋겠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사람이 읽는 동안 지루하지 않아야 하니 각각의 글들이 다양한 매력을 가졌으면 좋겠고, 책을 덮고 나서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서 이 책에 글을 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글을 함께 쓸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아마도 애초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소설이든 에세이든 글을 완성하고 나면, 자신의 글과 어울리는 종이와 두께를 고르고, 폰트를 고르고, 글자크기를 정하는 것이다. 글의 분위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는 글쓴이가 가장 잘 고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어쩌면 서로의 글을 바꿔 읽고 잘 어울리는 종이와 폰트를 추천해 줄 수도 있겠지.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의 글과 종이와 책들 사이에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우리들의 책을 이야기하는 상상은 그 자체로 참 즐겁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상상은 ‘희망편’이고, 실제로는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며 피 터지는 회의를 하게 되는 ‘절망편’으로 갈 확률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신의 지면을 자신의 스타일 데로 꾸밀 수 있으니 피 터지는 전쟁은 좀 덜하지 않을까, 하며 내 머릿속 상상을 희망편 쪽으로 멱살잡이 해본다.
사실 이런 내 상상 속의 책은 실제로 구현하기에는 매우 힘들 것 같긴 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책이나 글하고는 먼 일상을 살고 있고, 내가 이런 제안을 한다 해도 난색을 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까스로 사람을 모아 글쓰기와 책작업을 시작한다 해도 내지를 그처럼 다양하게 구성한다면 그에 대한 비용 또한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영영 내 상상 속의 책으로만 남게 될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장벽을 뛰어넘고 그런 책이 만들어진다면, 설령 단 한 권도 팔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뿌듯하기만 할 것 같다. 나의 추억이 아주 진하게 담겨있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귀한 한 권의 책이 될 테니까.
어릴 적 고모네 집에는 책이 많았다. 고모네 집에 놀러 가면 사촌언니가 읽던 책을 꺼내 읽는 것이 재미있었고, 그런 책을 읽는 사촌언니는 그 시절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촌들과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놀다가도 슬그머니 빠져나와 언니의 책꽂이를 들여다 보고는 한 권을 꺼내 읽곤 했다. 고모는 아직도 나를 보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며 웃으신다. 사촌들 무리에서 어느샌가 내가 없어 찾아가 보면 혼자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고, 왜 여기서 혼자 있느냐 물으면 큰 눈을 꿈뻑이며 ‘전 책 읽는 게 더 재밌어요.’라고 말하곤 했다고.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하필 책이 좋았고,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지금은 전혀 관계없는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세상에 찌든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책 속과 그림 속에서 나를 찾고 나를 만든다. 그러니 언젠가 내가 만드는 책은 나를 고스란히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 책이 너무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