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는 이유

by 린다


오래전 겨울, 독서모임을 처음 나갔을 때, 처음 본 사람들이 여럿 둘러앉아 어색한 기운을 뿜어내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모두 제각각이던 사람들이 만나 머뭇머뭇 눈인사를 건네던 뚝딱임도 잠시, 조금 시간이 지나자 책이라는 매개체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평소에 어떤 책을 읽는지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눴을 때, 어떤 회원님은 자신은 도저히 소설은 읽을 수가 없고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거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읽어야만 책을 읽은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설을 읽으면 그냥 시간을 버리고 때워버린 느낌이라고 말이다. 그 바로 다음이 내가 말할 차례였는데, 하필이면 나는 그 회원님과 정반대의 독서습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지식전달이나 자기 개발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고, 오로지 소설을 위주로 읽는데 그것이 시간을 보내는데 아주 좋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주로 소설을 읽는 편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다. 마치 십대 소녀들이 순정만화를 보고 허황된 로맨스를 꿈꾸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는 말투로. 물론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고,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그 회원님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도 전혀 아니다. 하지만 종종 소설을 읽는 나를 그런 철딱서니 없는 철부지 십 대처럼 보는 사람을 나는 분명히 겪은 적이 있다. 세상의 소설들이 모두 로맨스만을 그리고 있지 않고, 설령 로맨스를 그린다 한들 그게 잘못된 것일까? 십대 소녀들이 순정만화를 보고 감정을 이입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런 일들은 이십대에도 삼십대에도, 심지어 노년이 되어서도 충분히 하는 일인데.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분명하니까. 내가 소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이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지, 사회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바로 책을 읽는 독자가 상황에 ‘이입’을 할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편견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편협한 사고방식이 아닌가 싶은 각종 편견들을 속에 품고 있다. 이 편견들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건 알아서 자랑스럽게 ‘나는 이런 편견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진 않지만, 어쩌면 누군가와의 대화 중에 이리저리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부끄럽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싫어하는 것과 기피하는 것이 많았던 내가 그나마 이 정도 사람구실을 하는 데에는 책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 그것도 소설이 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나를 다양한 상황에 데려다준다. 때로는 엄마가 되기도 하고, 부모를 잃은 아이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현재의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큰 사건에 휘말려서 고초를 겪기도 하는 버라이어티한 상황의 중심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실제 그 상황이었다면 했을 선택과 소설 속 인물이 했던 선택을 비교해 보고 어떤 것이 더 옳은 선택인지를 저울질하다가 결국 옳은 선택이란 없고, 각자의 선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많았다. 세상엔 너무나 다양한 사람과 상황이 있다는 누구나 알 법한 진리를 소설을 통해서 제법 현실감 있고, 또 다양하게 느껴본 것이다. 이러이러한 편견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는 교훈을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 내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편견을 직접 겪고 있는 인물을 통해 알게 한다는 것이 내게 더 잘 맞는 것 같다.


소설 같은 상황은 반드시 소설에서만 일어나진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을 때가 많다. 현실에서 그런 일들과 마주하다 보면 누구나 당황하고 때때로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당연히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가 찾는 것은 이미 경험해 본 사람들이다.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힌트나 조언을 구하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거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주변에 이런 사람이나 어른이 존재한다면 정말 행운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동안 쌓아온 나의 경험들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나의 경우엔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이 내 사고를 많이 확장시켜 주었던 덕에 비교적 당황하지 않고 문제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책 읽기를 강조하면서 항상 언급되던 ‘간접경험’이라는 독서의 장점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 같달까. 소설 안에서는 크던 작던 항상 갈등상황이 펼쳐지고 그걸 지켜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겪어보며 일종의 노하우 같은 것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소설을 열심히 읽어왔다고 해서 모든 돌발상황에 능숙한 대처를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타인의 상황과 결정을 두고 ‘그럴 수도 있겠다’싶은 마음정도는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너는 내가 아니니 나와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 여기에서부터 타인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이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잠시 현실을 잊어보기도 하고, 힘든 일들을 이겨내고 결국엔 좋은 상황을 마주하는 등장인물을 보며 기운을 얻거나 위로를 받는 것 역시 내가 소설을 읽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다. 사실 원래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라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다만 드라마와 같은 영상매체는 전문가들이 만들어준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소설은 내가 스스로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내 맘 데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재밌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볼 때면 퀄리티 있고 어마어마한 구현력에 내 상상력 같은 건 조금 비루해 보이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짧은 소설을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다양한 가치를 가진 인물들이 뛰어노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 내가 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꽤 먼 미래의 일이 되거나 완성한다 해도 차마 부끄러워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음악가는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말로 표현한다는 것만 다를 뿐. 내 이야기가 글의 모습을 한 소설이 될지, 그림이 될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던 옛날의 전기수처럼 동네의 제일 큰 나무밑의 평상에서 사람들에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야기꾼 할머니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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