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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은둔자 Nov 29. 2021

엉터리 살림꾼의 이야기

오랜만에 대파를 사서 손질해서 소분해두다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다. 

이럴 땐 문득 내가 꼼꼼 살림녀가 된 기분이라 우습기도 하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다.


엄격한 기준으로 조금이라도 덜 싱싱해 보이는 부분은 다듬어버리며 문득 아까운 마음이 든다. 

갑자기 갈비탕이나 설렁탕이라도 먹으려는데 파가 똑떨어졌을 때는 그 한쪽도 얼마나 아쉬운데 말이지!


대파 한 단은 사실 대단한 양이다. 

언젠가부터는 냉동을 거부하고, 잘 손질해서 냉장실에 세워둔 대파를 보는 뿌듯함(관상용?)이 좋다.

요리를 많이 하지 않아서 사실 막판에는 시들어버린 적이 더 많다. 



명절에 음식이 남아, 더러 버린 적도 있는데도 못 먹게 되기 전에 누구에게 나누어줄 생각을 못 했다. 못 했다기보다는 그런 일이 번거로워서 하기가 싫었다.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작가님도 살림에는 큰 취미가 없으셨던 것 같다. 

책 속에서 쓱쓱 비치는 그런 인간미가 너무 좋다. 

마치 작가님이 빙의된 듯 싱크대 앞에서 대파를 글감으로 삼으며 비실비실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살림, 요리, 음식 이런 단어들은 자연히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 


친정 부모님이 시골집에 다녀오실 때면 늘 뭔가 많이 갖다주셨다. 

갓 수확된 싱싱한 자연의 산물들을 보고 있으면 뿌듯한데, 나는 요리에 큰 열정이 없는지라 끼고만 있다 냉장고 안에서 수명을 다하고 버린 적이 부지기수다(죄송합니다).


미리 누군가에게 나눠주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에게 택배로까지 보내주기엔 신선도도 떨어지고 너무 번거롭고..

새로 정착한 동네가 어색했던 터라 집 근처엔 친한 사람도 거의 없고..

 

한 번씩 대량의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할 때면 드는 감정이란

'나 이러다 벌받겠다' 하는 죄책감과 함께, 아는 누군가라도 만날까 봐 두근두근..





지난달엔 역대급 냉동실 정리를 했다. 

엄마가 떠나신 지 1년이 막 지났는데도 엄마가 마지막까지도 하나하나 싸주셨던 것들을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었는데 비로소 그것들을 다 정리해냈다. 


엄마가 계셨다면 등짝 스매싱감이지만..


"엄마, 나 이렇게 정리하는 게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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