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은둔자 Dec 01. 2021

기억의 창고 사진첩, 읽고 쓰는 나날

이제  우리 딸도 6살이 된다.

사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계속 미루고만 있다.  


매년 스튜디오에서 성장 사진을 찍어주진 않더라도 아이의 일상이 담긴 휴대폰 사진첩을 잘 정리해서 그중 베스트만 골라 매년 포토북 한 권은 만들어야지 했던 결심!

4살, 5살 적어도 2년 치는 정리 해야 한다.


사진 정리가 유독 오래 걸리는 이유는 내 새끼 사진은 참 지우기가 어려워서 이기도 하고, 또 그걸 다시 보면서 추억에 잠기다 보면 본래 목적과 달리 속도가 참 안 나기 때문이다.

아이의 사진첩을 보다 외손녀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되면 내 시간 또한 거기서 멈춰버린다.




그 아이는 내가 아들을 잃고 난 후 1년 안에 태어난 외손녀다.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여생에 다시는 근심도 기쁨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지옥 같은 고통에 지쳤을 때 겨우 콩꼬투리만 한 새 생명이 기적처럼 나에게 왔다. 그 새 생명을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나에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엄마가 떠나고, 남은 우리 가족들에게는 아이가 유일한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물론 엄마가 투병 중이실 때도 그랬지만 우리 모두에게 너무 소중한 엄마의 상실은 머리를, 일상을, 마비시킬 것만 같았다.


엄마를 잃은 나이지만 동시에 나는 4살 딸아이의 엄마였고, 내가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아이에 맞춰 일상을 잘 살아내고 있었다.

아이 때문에 울고 웃으며 행복감도 여전했다. 가끔씩 내가 엄마가 없는데도 이렇게 웃고 잘 살고 있다니 참 어처구니없고 야속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근심도 기쁨도 없이 목석처럼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은 건 거짓말이었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그 애의 생명력이 눈부시다면 내 생명력은 또 얼마나 징그러운가. 나는 딴 손자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 애를 얼마나 편애했던가. 그건 손자 사랑이라기보다는 마음 붙일 수 있는 걸 찾아내어 놓치고 싶지 않은 자기애가 아니었을까. 그 한 장의 사진은 잊고 지내던 당시의 태산 같은 고통과 함께 온갖 자질구레한 기쁨과 슬픔을 불러내어 나를 부끄럽게도, 하염없게도 한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작가님이 손녀와 함께 찍힌 사진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이 나를 또 건드렸다.


엄마의 이번 항암치료는 몇 년 전과 달리 부작용이 다양했고 그 정도가 심했고 고통스러웠다.

아빠가 온전히 엄마를 돌보고 계셨고 아빠의 후배들, 혹은 그분들의 지인들이 주치의가 되었고 조금은 더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여겨온지라 나는 한발 물러나 있었던 것 같다.

어린아이를 보느라 바쁘고 힘들다는 전제하에 어쩌면 나는 딸이라서 더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적극적인 돌봄의 역할에서 빠져있었다.


엄마가 떠나고 문득문득 그런 자책감이 올라왔다.  

나는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구나, 엄마가 매일 죽음의 고통과 마주하며 있을 때 나는 내 몸뚱이가 더 중요했고, 내 자식, 내 남편이 더 중요했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서도 엄마에게 너무너무 미안했다.


엄마가 시골집으로 가시고 나서는 마음만큼 자주 찾아뵙기도 쉽지 않았다.

참 어리석게도, 우리 엄마는 강한 사람이고 당연히 이겨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한 결정은 우연찮게 날아든 취업의 기회로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빠와 결혼 후 같은 회사를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살아온 엄마의 인생 대부분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삶에 가장 큰 무게가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서도 계속 나의 커리어를 이어가기를 누구보다도 가장 바란 사람이 엄마였다.


경단녀 생활을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과 더불어, 긴 통근 시간을 견디며 출근하는 남편을 두고 한참 엄마 손이 많이 가는 아이를 두고 혹은 아이를 데리고 내가 엄마 곁에서 엄마를 보살필 수 없으니 차라리 직장인으로라도 사는 게 나의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선택 같기도 했다.

엄마가 내 소식을 듣고 좋아할만한 선택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 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중에는 나 자신도 판독 불가능한 것이 있지만 나라는 촉수가 닿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 게 빤히 보여서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운 까닭이다. 당시에는 안 보이던 사물의 이중성과 명암, 비의秘意가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묵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이자 전율이다. 나라는 촉수는 바로 현실이라는 시점이 아닐까. 이미 지나간 영상을 불러내서 상상력의 입김을 불어넣고 남의 관심까지 끌고 싶은 기억에의 애착이야말로 나의 글쓰기의 원동력이자 한계 같은 것이 아닐까, 요즈음 문득문득 생각한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내 기억의 창고를 조금씩 들춰보는 2021년 10월.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둔 사진과 지금 읽고 있는 책들, 그리고 글쓰기의 시작으로 엉킨 실타래 같은 기억들을 그냥 손에 잡히는 부분부터 풀어보며 틈을 헤집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엉터리 살림꾼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