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내가 아들을 잃고 난 후 1년 안에 태어난 외손녀다. 아들을 잃었을 때, 내 여생에 다시는 근심도 기쁨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지옥 같은 고통에 지쳤을 때 겨우 콩꼬투리만 한 새 생명이 기적처럼 나에게 왔다. 그 새 생명을 처음 대면했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나에게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근심도 기쁨도 없이 목석처럼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은 건 거짓말이었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그 애의 생명력이 눈부시다면 내 생명력은 또 얼마나 징그러운가. 나는 딴 손자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 애를 얼마나 편애했던가. 그건 손자 사랑이라기보다는 마음 붙일 수 있는 걸 찾아내어 놓치고 싶지 않은 자기애가 아니었을까. 그 한 장의 사진은 잊고 지내던 당시의 태산 같은 고통과 함께 온갖 자질구레한 기쁨과 슬픔을 불러내어 나를 부끄럽게도, 하염없게도 한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 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중에는 나 자신도 판독 불가능한 것이 있지만 나라는 촉수가 닿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 게 빤히 보여서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운 까닭이다. 당시에는 안 보이던 사물의 이중성과 명암, 비의秘意가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묵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이자 전율이다. 나라는 촉수는 바로 현실이라는 시점이 아닐까. 이미 지나간 영상을 불러내서 상상력의 입김을 불어넣고 남의 관심까지 끌고 싶은 기억에의 애착이야말로 나의 글쓰기의 원동력이자 한계 같은 것이 아닐까, 요즈음 문득문득 생각한다.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