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역사를 유쾌한 톤으로 다룬다는 것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본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이런 할머니 본적 있니?
나는 정말 처음이다. 비극적 역사를 유쾌한 톤으로 다루는 영화 말이다. 내가 본 영화 중엔 아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유일한 것 같은데, <인생은 아름다워>도 결국 그 모든 웃음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자 되려 나를 더욱 큰소리로 울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었나. 특히나 위안부와 같은 민감한 소재를 코미디 영화로 만드는 것은 감독 입장에서도 정말 '잘' 다룰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쉽게 엄두가 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시종일관 유쾌해서 좋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 속 옥분(나문희 분)이 유쾌한 캐릭터라서 좋았다. 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한 캐릭터라고 하여 꼭 우울하고 늘 가슴 아파하는 모습일 필요가 있을까? 언제부턴가 미디어 속에 일관되게 재현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이 되려 피해자에게 슬픔을 강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현실에서의 위안부 피해자 분들은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만나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부터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은 분들까지 그 분들은 당신들의 과거와는 별도로 지금-여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옥분이 가진 넘치는 에너지가 나는 신선했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뛰어가는 모습이 좋았다. 나는, 그리고 이 사회는 위안부 피해자의 현재 삶이 어떤지 충분한 고민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현재의 삶을 항상 과거와 연결하여 이해하려 했고 그렇기에 당신들은 늘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당신의 과거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당신의 '현재'의 삶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옥분의 유쾌하고 활기 찬 모습은 피해자 할머니들께도 이런 에너지 넘치는 당신들의 삶이 있기를, 힘든 과거를 온전히 잊지는 못하더라도 당신들에게 더 나은 날들, 따뜻하고 행복한 날들이 있기를 처음으로 소망하게 했다. 이 영화가 코미디라는 장르를 가져와 이루어낸 지점이다.
그래도 여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아쉬운 부분들은 있다. 우선 나는 이 영화가 위안부 피해자보다는 관객의 쪽에 훨씬 더 가까이 서 있다는 점을 짚고 가고 싶다. 나쁘게 말하면 영화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민이나 아픔, 현대 사회에서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고민한 흔적이나 이를 표현하려는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가 택한 서사, 그리고 캐릭터 묘사와 그들의 대사 속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이런 것이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옥분이 머나 먼 미국 땅에서 증언대에 섰을 때 위안부 피해자가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자 옥분이 그동안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그것이 나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 '알량한 자존심' 문제일리가 있나. 피해자들에겐 피해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반되는 수많은 2차 가해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고 옥분 할머니에게 진실을 밝히는 일은 '알량한 자존심' 외에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캐릭터의 입에서 직접 나온 이 대사를 듣고 나는 마음 속으로 부디 피해 사실을 밝힌, 그리고 밝히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이 말을 듣지 못하셨기를 바랐다.
영화의 서사는 또 어떠한가, 영화는 재미있는 컨셉과 대중적 서사구조를 택했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이 실질적으로 겪는 어려움과 그들의 소망과 고민, 그들이 그들의 아픔을 기억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깊이있게 풀어내지는 못한다. 옥분의 캐릭터는 분명 신선하고 사랑스럽지만 옥분의 내면 묘사가 깊이있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옥분은 평면적인 캐릭터에 그치고 말았다. 영화는 유쾌한 코미디와 드라마틱한 구성을 만드느라 진을 뺐는지 캐릭터의 내면 묘사는 생략된 채 클리쉐의 반복에 이르렀다. 화려한 치장에 집중하다가 정작 해야할 진짜 이야기를 놓쳐버린 느낌이다.
한편 이 모든 것은 또 영화가 '관객'의 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가 포기한 것이 있는 만큼 영화가 취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한 지인에게 소감을 물으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감동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옥분의 과거 이야기가 공개되고 옥분이 증언을 위해 스스로 미국행을 택하는 모습에서 나 또한 영화 도중 종종 눈물을 훔치기도 했으니 나도 영화를 통해 적지 않은 감동을 느꼈다.
<아이 캔 스피크>는 감동적인 영화다. 영화는 피해자들의 실제 심리를 표현하는 것을 포기한 대신 관객들에게 시종일관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서사와 감정선을 매력적으로 구성한다. 여기서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분노, 피해자와의 정서적 거리 좁히기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즉 영화는 관객의 편에 서기를 선택하면서 강한 대중적 호소력을 획득했다. 관객에게 전달될 메시지가 (그 실상은 훨씬 복잡함에도)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는 점, 깊이 있는 고민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어쨌던 감독으로서 자신의 단순하지만 명료한 메시지가 힘을 갖고 관객에게 전달이 되었으니 그 또한 이 영화가 이뤄낸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