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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Oct 10. 2017

#60 <룸> 두 서사가 교차하는 자리에

결국 영화는 희망을 택했다.




  두 개의 서사가 있다. 이 두 서사는 영화 전반에 걸쳐 동등하게 진행되는데 그 둘이 너무나도 달라서 어떻게 한 영화 속에서 동시에 진행됐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하나는 성장에 관한 서사이며, 다른 하나는 인생에 산재한 비극에 관한 서사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사건에 놓여 있지만 잭과 조이의 입장은 그만큼 너무나도 달랐고 그랬기에 이들의 서사는 너무나도 다른 양상이어야 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둘은 시소의 양 끝과도 같아서 하나가 바닥을 치면 다른 하나가 하늘 높이 하늘을 향한다. 놀라운 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사가 만날 때 높이 올라간 시소가 다른 시소를 이끌어 세우면서 비로소 균형을 찾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절망과 한 사람의 희망이 공존하는 순간, 영화는 위태 위태 움직이던 시소가 서로를 일으키고 또 낮추어 균형을 찾으려는 그 둘의 관계를 포착한다.


 한번 두 서사를 분리해서 보자. 룸으로부터 탈출하기 전, 잭에게 ‘룸’은 그저 세상의 전부이다. 잭은 더 큰 세상에 관심이 없다. 오직 ‘룸’의 안에서 자신이 엄마와 함께 만든 룰과 논리만으로 온 세상을 구축할 수 있었다. 잭은 늘 이 룸 안에서의 삶만을 상상했고 그랬기에 잭의 상상 속 미래는 오직 룸 안에 있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조이는 잭에게 더 큰 세상과 (잭의 눈에는)기괴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해주고는 잭을 더 큰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 잭의 눈동자에 드넓은 하늘이 맺혔을 때 잭이 표현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잭의 눈빛은 경외감으로 바뀐다. 엄마의 말처럼 아이는 더 큰 세상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룸’ 밖으로의 탈출이 조이에게 갖는 의미는 다르다. 그것은 좀처럼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온갖 좌절로 점철된 인생이 마지막으로 거는 희망이다. 룸이 잭에게 온 세상이었지만 조이에게 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감옥이다. 조이는 도저히 이 감옥 속에서 삶을 지속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룸 안에서 어떻게 생각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조이에게 탈출은 삶의 회복이자 지속가능성 이었다.


  그랬기에 조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잭에게 거대한 동력이 되어 잭의 편의 시소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엄마의 이를 꼭 물고 세상에 나간 잭은 서서히 침몰하던 엄마의 삶을 구한다. 룸과 탈출이 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다르지만 둘의 서사가 서로 손을 맞잡은 지점에서 시소는 다시 희망의 균형을 맞춘다.



  룸으로부터 탈출한 후에도 여전히 조이와 잭의 서사는 다르게 전개된다. 조이에게 오직 희망은 룸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렇게 삶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세상의 관심과 가시 돋친 질문들, 이혼한 부모, 자신 없이도 모두가 잘 살고 있었다는 데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 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 잭의 성장에 대한 조급함. 탈출 후에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조이의 인생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늘 그렇듯 비극은 인생 전반에 걸쳐 산재되어 있고 행복이 있을 것이라 믿었던 자리에 순도 100%의 행복이 있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


  잭은 세상의 밖에서 그의 성장통을 계속하고 있다. 룸 밖의 세상은 모두 이해하기엔 너무 넓다는 것에 대해. 세상엔 엄마 외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과도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작아진 룸만큼이나 또 작아진 엄마에 대해. 끝끝내 화장실에서 힘없이 스러져있던 엄마에 대해. 손쉽게 이 모든 것에 답을 찾지 못하면서 말이다. 엄마가 좌절하고 끝끝내 병원에 실려 갔을 때 잭은 생에 처음으로 엄마와 분리되었고 잭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며 엄마에게 소리친다. “당장 돌아와!” 잭은 때때로 룸의 문이 열리기 전, 그 시절이 그립다.


하지만 잭은 빠르게 삶의 행복을 찾아낸다. 엄마 외의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잭이 결국 할머니에게 ‘I Love you Grandma’라는 말을 했을 때, 잭은 이미 엄마에게 자신의 힘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그 통증을 극복했다. 이번에 시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잭의 몫이었다. 잭은 엄마가 회복하게 하는 이유이자 궁극적으로 엄마를 다시 삶에 안착시키는 균형 축이었다.


"나는 아마 좋은 엄마가 아닌가봐." "그래도 엄마는 엄마잖아"


다시 조이와 잭의 각각의 서사를 이어 붙여 본다면 그 각각의 서사는 분명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잭의 이야기는 피투성의 존재로서의 인간 모두가 숙명적으로 겪는 성장통에 관한 은유, 조이의 이야기는 행복이 있을거라 믿은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비극을 마주하는 인간 삶의 보편적 운명을 은유한다. 서로 다른 인물, 서로 다른 질감의 이야기를 왜 한 영화 속에서 함께 다뤘는가, (그럼에도 이 서사들이 영화 속에서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과는 별개로) 왜 이 둘을 모두 담는 선택을 했는가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희망을 믿기 때문이다. 조이와 잭의 입장 차로부터 오는 개별적 서사와 이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빠짐없이 담은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함인 것이다. 서로 너무나도 다른 세상, 다른 상황에 있기에 아픔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는 두 주체가 손을 맞잡고 서로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비극도 견뎌낼 수 있다고, 그렇게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에 나도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가 될 수 없고 그렇기에 나만이 견뎌야 하는 이 복잡하고도 어려운 상황들이 존재하지만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시소처럼 잡아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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