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영화 중 가장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청춘 영화
영화를 보면서 딱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으로는 저렇게 히스레저와 일평생 함께하며 그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응원했던 사람들이 많았다니,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죽고난 후에 나를 위해 저런 증언을 해줄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가는 길에 순도 높은 우정만으로 나를 온 마음으로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의 삶은 그 많은 우정과 사랑으로 풍요로웠겠구나 하는 부러운 마음 한 가득.
두번째로는 저렇게 거침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청년이 또 있을까, 하는 감탄이었다. 자신을 있는 힘껏 드러내는 데에 조금도 두려움이 없고 결코 지치지 않는 사람. 자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느껴졌다. 히스레저의 넘치는 재능과 예술적 감각, 그의 짧은 생에 쌓아온 커리어보다도 그런 그의 원동력이 부러웠다. 삶의 어떤 굴곡 속에서도 나는 나일수 있다는 긍정. 당당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 그건 사실 나에게 가장 결핍되어 있던 것이면서도 내가 늘 갈망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늘 남과 나를 줄세워 비교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핸디캡도 있었겠지만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나'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모습이 너에게는 괴상하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 나의 본심이, 나의 생각이, 나의 말투가, 나의 웃음소리가, 나의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불쾌한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처음에는 그저 타인을 만날 때 가장 먼저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공포가 점점 더 커졌을 때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방어적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난 실패할거야. 재능이 없는 일에 청춘을 낭비하지 말자." "나는 예쁘지 않아서 사람들이 관심갖지 않을거야. 오늘 미팅은 그냥 나가지 말자." "내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건 그만두자." 이런 어두운 생각들에 자아가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새 내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구속하게 된다. 제대로 노력조차 해보지 않고 그저 얄팍한 근거들을 대며 '난 안될거야'가 입에 붙는다. 비단 어디 나만의 이야기일까. 이런 어두운 생각들에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아파하는 친구들과 나는 함께 자라왔다.
히스 레저가 처음부터 타고난 천재였던 아니던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가 그의 자신에게 향하는 에너지이다. 자신을 더 알고자 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두려움이 없는 히스. 영화 속 히스 레저가 찍은 영상 중 반 이상이 셀프 동영상이다. 가장 자신있는 한 가지 각도로만 사진을 찍어 올려온 나에게는 다양한 각도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히스가 신기했다. 모든 각도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조금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그럴 수 있기에 자신의 본모습에 좀더 자신있게 다가가는 그런 사람. 그런 히스 레저이기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의심하지 않고 그의 모든 행보는 결국 그 자신의 본질로 다가가는 과정이 된다.
"나에게 연기는 나 자신을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배우로 살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나는 히스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졌기에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한 열일곱 오스트레일리안 소년이 무작정 LA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단단한 마음과 자신감을 지녔어야 했을까. 그뿐이랴. 영화에서 몇번을 강조했듯 그는 매번 감독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역할을 따냈고 새로운 역할을 도전처럼 맞이했다. 연기뿐 아니라 연출과 음악과 포토그래피 등 마음이 끌리면 예술의 영역을 넘나들었고 커리어를 쌓으면 쌓을수록 더 자유로워졌다. 한 사람이 이런 에너지를 가지려면 자신 스스로를 얼마나 단단하고 진실되게 믿어야 하는걸까. 나는 나를 그만큼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이만큼 도전할 수 있을까.
좋은 영화를 보고나면 결국 시선은 나로 향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한동안 나의 마음이 꿈틀대는 그 자리를 응시했다. <아이 엠 히스 레저>는 최근 본 청춘 영화 중 가장 가슴에 많이 와닿는 좋은 영화였다. 그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천재 연기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히스 레저의 일생을 접하며 오랜만에 꽤 괜찮은 '힐링'을 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히스 레저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찬양처럼 보이는 영화라는 점. 그의 인생에도 분명 굴곡들이 있었는데 그 어려움들을 '타고난 재능'으로 너무 쉽게 이겨내는 듯하다. 정말 그랬을까? 그건 사실 지극히 결과론적으로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히스 레저는 두려움 앞에서 어땠을까. 그의 자아는 어떻게 그 굴곡들을 이겨냈을까. 영화가 이런 부분들에도 공정하게 응시해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없다면, 성장하지 못한다.
by Heath Ledger
*본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