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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Nov 08. 2017

#63 <헝거> 그들이 신념을 지키는 방식

샌즈의 신념과 매퀸의 신념

한 수감자가 끌려들어온다. 이미 이동과 행위의 자유는 속박된다. 주장할 수 있는 목소리도 지워진다. 그들의 과거 행적의 동기들도 지워진다. 그들이 추구한 신념들이 가려진다. 끌려온 수감자에게 남는 것은 몸뚱아리 뿐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오직 몸만이 남았을 때도 저항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헝거>는 그런 신념의 드라마를 그려낸다.



“이 사회에 정치적 살인과 정치적 폭격과 정치적 폭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형사상의 살인과 형사상의 폭격과 형사상의 폭력이 있을 뿐입니다.”


마가렛 대처는 북아일랜드 분쟁 중 수감된 IRA 재소자들을 정치범이라는 지위를 박탈한다. 그리고 IRA 재소자들은 이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들이 정치범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회복하고자 한 것은 죄수복을 입지 않고 노역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 뿐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투쟁에 ‘정치적 이유’를 제거당하고 난 후에는 오직 폭력과 살인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치범으로 인정 받는 것은 제거당한 동기, 제거당한 투쟁의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이다.


“당신에겐 자살처럼 보이겠지만 나에겐 타살이나 다름 없어요.”


모든 투쟁의 수단을 박탈당했을 때 마지막 남은 투쟁의 수단은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방식 뿐이다. 1차 단식 투쟁은 결국 실패했지만, 세계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수감소에서 제 아무리 투쟁의 목소리를 높여도 공허한 소리가 되어 버리는 상황 속에서 신념이 삶의 전부인 이들에게 단식 투쟁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보비 샌즈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단식 투쟁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 <헝거> 스틸컷. 모든 투쟁의 수단을 박탈당했을 때 마지막 남은 투쟁의 수단은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방식 뿐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 이 영화에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헝거>는 각색되어 있지 않은 역사의 한 사건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송경원 비평가는 역사를 재현하려는 그 모든 영화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 이유를 서술한 적 있다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들의 한계와 우려에 관하여"-씨네21).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는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현재의 어떤 한 시각을 재현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매퀸의 <헝거>는 감독이 (누군가의 행위를 옹호하려는)특정 시각을 위해 선택적으로 이미지와 서사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우려를 일면 해소한다. IRA가 살해한 교도관은 아픈 어머니를 사랑한 아들이다. 신부의 입을 통해 보비 샌즈의 행위는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정당하지 못한 ‘자살’임을 고발당한다. <헝거> 속 수감자들의 투쟁은 편집되지 않은 역사 그 자체 속에서 덩어리째로 건져올린 이야기이다.


 역사를 조각하는 것을 거부한, 역사를 각색하지 않은 <헝거>는 이들이 투쟁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포착해낼 수 있다. 어떤 메시지를 위해 날카롭지만 자칫 협소해질 수 있는 한 사건의 해석이 아니라 그 사회자체를 걷어 올리면서 사회적 맥락, 역사적 맥락 좀더 큰 프레임 속에서 이들의 행위의 위치를 함께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보비 샌즈의 투쟁이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당대 단식 투쟁에 관한 다양한 사회의 시선과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투쟁과 함께 보여주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는 큰 차이가 있다.  담담히 거시적인 관점에서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누락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스탠스를 취하면서 <헝거>는 좀더 명료하고 정확하게 IRA의 단식 투쟁을 포착한 것이다.


<헝거>는 스티브 매퀸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보비 샌즈와 단식 투쟁 참여자들의 신념을 보여줌과 동시에 매퀸 감독이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신념 또한 드러낸다. 샌즈의 죽음과 매퀸의 이후의 행보를 통해 두 가지 신념이 굳건히 지켜져왔음을 알기에 이 영화는 더욱 숭고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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