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영원히 실패하지 않을 줄 알았어?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보고 르윈이 느끼는 실패가 쓰디 쓰게 느껴져 한 동안 그 모습이 깊게 가슴에 박혀 있었다. 르윈이 실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댔던 그 모습에서 내 인생 속, 실패를 맛 봤던 수많은 순간들이 소환되었다. 한 사람의 꿈이 실패해 끝내 소멸하는 이야기에 그토록 먹먹했던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톤이 훨씬 더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무려 여섯 명이 줄줄이 실패하니까 말이다.
세상은 말한다. 실패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한편 성공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따로 있다고. 이 이유들을 알기 위해 수많은 계발서가 서점에서 팔리고, 강연에서 이야기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논의를 단박에 무의미하게 만든다. <미스 리틀 선샤인>은 당신이 늘 자신감에 차 있더라도, 승리를 직감했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더라도, 당신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 말한다. 줄줄이 실패를 경험하는 여섯 명의 이야기는 결국 실패는 인간의 숙명같은 것으로 결코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 이제 조금 다른 논의를 할 시간이다. 실패가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면 우리는 실패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실패를 겪은 ‘이방인’ 프랭크가 성공만이 인생의 길이라 믿는 후버 가족에 편입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프랭크는 자신이 자살을 택하기까지의 긴 이야기와 수많은 이유들을 펼쳐놓는다. 그러나 식탁을 둘러싼 가족들은 프랭크가 겪은 실패와 고통을 가족 구성원들은 관심조차 없거나, 가엽고 걱정스럽거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거나, 자신의 우월감을 도취시키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프랭크는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인 것이 아니라, 성공을 믿는 이들에게 ‘실패자’이기 때문에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그런 가족들의 눈빛이 낯설지만은 않다. 사람들은 스스로 실패하기 전까지(혹은 실패를 경험한 후에도), 실패한 사람의 모습에 관심 갖지 않는다. 자신이 그 입장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이, 실패자는 자신과 무관한 ‘타자’에 불과하다는 눈빛을 보내곤 한다. 꽤, 자주.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가 열리는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한 후버 가족의 로드 트립이 시작되면서 차차 가족들의 눈빛에도 당황스러움이 가득찬다. 처음엔 불운의 반복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처하면서 그 실패가 암시되는 듯하더니, 인생 전반에 타격을 받을 큰 실패가 각자의 인생에 찾아온다. 올리브는 자신이 미스 캘리포니아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손녀의 대회를 고대하던 할아버지는 캘리포니아 닿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드웨인은 색맹임이 밝혀지며 전투 조종사를 포기해야 했고, 리차드는 꿈꾸던 출판 계약이 무산되었음을 알게 된다.
실패의 연속을 겪은 가족이 캘리포니아에 이르러 다시금 성공에 자신만만한 이들의 눈빛에 둘러싸이는 상황은 흥미롭다. 여정 속에서 수많은 외적, 내적 시련을 겪은 가족은 이제 이 성공을 확신하는 눈빛들에서 낯선 자신의 과거를 응시하게 된다. 후버 가족은 그들의 앞에서 실패자의 모습을, 그 눈빛을 당당하게 내보인다. 영화는 달려 오는 내내 후버 가족의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를 내더니 그제야 실패의 상처를 일부, 봉합시킨다.
그 어떤 인생을 살더라도 결국 우리는 매번 유리한 쪽에 서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어떤 얼굴로, 어떤 자세로, 그리고 어떻게 딛고 일어날 것인가. 혹은 우리는 인생에 늘 도사리고 있는 실패의 가능성에서 어떻게 그 불안감을 안고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실패하지 않을 방법 대신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사실 거기에도 일련의 정답이란 없는 것이라 영화는 온 가족을, 다양한 인간군상을 가져와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용히 자신을 대변하고(프랭크), 누군가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 분노를 드러내며 자신을 변호한다(리차드). 감정을 온 힘으로 분출한 후 따뜻한 손길에 위로받고(드웨인), 누군가는 당당하게 준비한 것을 꺼내, 가치를 전복하는 방식을 택한다(올리브). 영화는 그렇게 실패의 좌절감을 모두 분출하여 소진시킨 후에야 비로소 다시 얻을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그 힘든 여정 끝에서 보여준다. 다시 달리는 버스에 웃으며 올라탈 수 있는, 그렇게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에너지의 힘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