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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Dec 05. 2017

그리고 사랑이 있었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여자 둘의 우정 앞에서 그 남자의 사랑은 별것도 아니였지, <칠월과 안생

수업 중에 한 학기 동안 영상을 만들어 오라는 수업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연출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서 (그후 혼자 영화를 만들겠다는 객기가 초래한 개고생은 예상치 못하고) 집에 가자마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구 적어 나갔다. 당시 각본 쓰는 법조차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던 내가 만든 나의 첫 데뷔작은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말해보자면 당시 내가 만들었던 영화의 이야기는 이랬다.


성격, 외모, 패션 스타일, 일상 습관, 삶의 모습까지 처음부터 너무 다른 두 사람(혜림과 주은)이 있는데, 그 둘이 서로를 부러워 하는 거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은 가진 상대방이 너무나도 부럽고 질투도 나고, 그럼에도 동경하게 되고 그러자 또 그 사람의 모습과 행동 하나하나를 남몰래 흠모하게 된다. 끊임없이 내가 가진 것들과 상대방이 가진 것들을 비교한 자는 결국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깊은 곳에 내면화한다. 한 계절이 지나고 두 사람은 다시 길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는데, 그 둘이 영화 처음과는 너무 다른 모습으로 서 있게 된다. 근데 그들의 모습이 영화의 첫 장면 속 상대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이다. 혜림은 주은의 모습으로, 주은은 혜림의 모습으로.


당시 나는 그것이 내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자 나의 내면 속의 수많은 모습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면모를 가진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나는 그것을 따라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들을 그저 내가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타인을 열심히 따라하다 보니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 모든 노력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다. 남는 것은? 얼룩진 나의 자격지심 뿐. 어그러진 나와 상대방 사이의 관계들 뿐.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그런 나의 영화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는데, 그 '한 발짝'이 나를 꽤나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사랑은 질투를 이길거야. 그곳에는 분명 사랑이 있을거야,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치유하고 살아가게 될거야’, 라는 굳은 선언. 영화는 두 여자의 순도 높은 우정(과 사랑)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야 만다. 나의 영화에는 타인을 통해 마주한 공허한 '나'만이, 그리고 그 마주침을 통한 허무주의만이 존재했다면, 영화에는 '타인'과의 공존이자, 그 공존을 통한 치유와 극복을 보여주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좀 해볼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삶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거의 자매와 다를 것 없이 함께 살아 온 안생과 칠월에게 서로의 인생은 그랬다. 칠월은 안정된 삶을 원했다. 살아갈 곳도, 앞으로의 미래도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 그래서 칠월은 열심히 공부를 했고,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했다.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를 떠난 다른 사랑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안생은 달랐다. 안생의 삶에 처음부터 안정된 것이란 없었기에, 안생은 그저 내키는대로 떠났다. 사랑이 떠나면 또다른 사랑을 찾았고,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면 곧바로 털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살던 이들이 어느 순간 깨닫는다. 방랑 생활에 지쳐버린 안생은 안정된 것들을 찾길 원했고, 열심히 쌓아온 자신의 것들이 위태해지는 것을 보며 칠월은 버둥거리며 노력했던, 하지만 지극히도 지난했던, 지난 날들에 좌절을 느낀다. 그들은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지독히도 부러워했다는 것을.


 

이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시기심(사실 나는 이들이 서로에게 가졌던 감정은 시기와 동경의 복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은 잘생긴 남자 '소가명'이 끼어들어면서 더욱 가시화된다. 가명은 칠월이 사랑했던 남자며 칠월의 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생이 가명을 사랑하게 되고, 가명이 칠월과 안생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며, 이 상황을 처음 그 시작부터 예감했던 칠월. 어찌보면 뻔한 삼각관계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는 여기서 사랑(가명)을 버리고 두 여자의 우정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 뻔한 서사를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가져온다.

 

중요한건 이들이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게 아니다. 가명이 온마음으로 칠월을 사랑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중요한건 안생과 칠월이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안생과 칠월의 감정이 오직 시기와 질투로 얼룩지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 건, 결국 안생과 칠월이 서로를 또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너를 미워했어."


칠월과 안생은 서로의 삶에 대한 시기와 연민이 공존했다. 언젠가 그들은 마주앉아 서로의 시기심에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진다.

정말 칠월과 안생이 처음 헤어지던 그때 처럼 서로를 안아주던 순간이 올까? 그렇게 서로의 지난 인생마저도 안아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렇게 14년의 인생이 돌고 돌아, 마침내 안생이 안정된 삶을 찾고, 칠월이 결혼과 고향을 포기하게 되는 날에 안생과 칠월은 다시 만나게 된다. 영어학원에서 나오는 안생과 여행객 차림으로 안생의 앞에 나타난 칠월. 비로소 안생과 칠월은 침대에 누워 꼭 손을 맞잡으며 서로의 인생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또 축복한다.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우리 모두 안다. 특히나 질투로 한번 얼룩졌던 관계라면 더더욱.


칠월은 임신을 했고, 가슴 아프게도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뜬다. 그토록 부러워했던 자유로운 삶을 단 하루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안생은 자유롭고 행복한 그녀의 인생을 칠월의 삶을 소설 속에서 이어간다.  그것이 안생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보낼 수 있는, 그녀의 삶에 대한 작은 찬사이자 축복이었을 것이다.

 

14년의 시간이 돌고 돌아, 비로소 안생과 칠월은 서로의 인생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두 여자의 그 선명한 감정들에 찬사를 보내야 했다. 그 둘의 감정은 조금의 이질감 없이 생생한 리얼리티가 존재했으니까. 오랜 친구를 가진 이라면 이 영화에 가슴 저려오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살아서 움직이는 두 여자의 감정을 정신없이 따라가다가 그 끝에서 희망의 메시지가 보였을 때, 나는 또다시 마음 속 깊이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은 질투를 이깁니다. 사랑은 그 모든 감정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안생과 칠월이 스크린에서 내려오며, 나에게 그렇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서로를 시기하는 이들이 그 감정의 얼룩을 극복할 수 있는 방편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고작 사랑으로 해결될 것이라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사랑으로 해결이 되더라'라는허무맹랑할 수 있는 이 명제를, 영화는 안생과 칠월의 삶을 따라간 후에 증명해 보인다. 안생과 칠월이 그토록 현실적이었고, 그들의 진하고 선명한 감정들에는 리얼리티가 있었다. 그랬기에 영화를 보는 나(와같은 회의론자)로 하여금 ‘그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구나’, 라고, 그것을 설득력 있는 명제로 탈바꿈 해 놓는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자, 영화의 힘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 칠월과 안생이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을 잘 드러내 마음을 더 아려오게 하는 것은 영화의 또다른 매력. 안생과 칠월은 그런 점에서 여성 연대의 서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말이다. 여자들은 어떤 길을 택해도 모두 힘들게 되어 있어." 안생의 어머니의 대사.


**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이 제작자로 들어간 작품이다. 홍콩에서 지내던 어느 날, <첨밀밀>을 보고 한 동안 그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홍콩 거리가 온통 <첨밀밀> 속 세상처럼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또한번 진한 여운을 주었던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진가신 감독의 선구안이 돋보였다.


***본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시사회 관람 후 작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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