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71억 명의 하루가 있었다.
나에게 질문을 했다. 중동 국가에서 쓰여진 문학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가? 아프리카 국가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TV쇼는? 부끄럽게도 나의 대답은 모두 ‘아니오’였다. (유일하게 자메이카 출신 작가 말런 제임스의 소설을 딱 한 권 읽어 보았을 뿐이다. 그 마저도 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맨 부커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읽었다. 결국 서구의 선택을 거친 소설을 읽은 셈이다.) 한편 내게 미묘하게 다른 질문도 해봤다. 대신 중동에 대해, 아프리카에 대해, 동남아시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영화나 소설 등을 접해 보았는가. 대답은 모두 ‘예스’였다.
내가 아직 공부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제도권 교육 속에서 자라면서 미국, 유럽에서 쓰이고 제작된 수백 개의 소설과 영화을 접해왔다는 점에서 내가, 이 사회가 얼마나 편향된 인구의 목소리만을 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비서구권의 세계를 오직 서구의 목소리를 통해 접하고 있다는 것이 내포하는 바은 더욱 복잡하다. ‘지구촌’으로 불리는 시대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미국’과 ‘유럽’의 목소리를 빌려 서로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타자화’된 시선과 각 국가 혹은 개인의 이데올로기, 정치적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을 촬영하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192개국으로부터 4,500 시간의 촬영분량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영상은 2010년 7월 24일, 단 하루 동안 찍힌 영상입니다.”
<라이프 인 어 데이>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직접 그들의 하루를 찍어서 유튜브에 올려달라는 요청으로부터 영화의 기획이 시작된다. 처음엔 ‘미래 세대를 위한 기록물’로서의 다큐멘터리라고 소개했지만, 여기에는 배제되어 왔던 목소리들을 기록한다는 데에서 현재 세대를 위한 기록물이 되기도 한다. 직접, 카메라를 드시오. 그렇게 스스로 목소리를 내시오. 당신의 일상으로부터 그 목소리를 시작해 보시오. 그렇게 ‘객체’로서만 존재했던 지구의 수많은 인구들이 어느새 ‘주체’로서 자리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아프리카와 중남아메리카,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세계가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질 때 그 질감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게 된다.
타자의 정치적 시선이 제거된 자리에는 오직 ‘삶’의 자리한다. 그것이 목소리의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질감의 가장 큰 차이이다. 서구 미디어에서 중동 국가들을 비추는 방식은 오직 ‘전쟁’과 ‘종교’, 아프리카 국가들을 비추는 방식은 오직 ‘기아’와 ‘노동 착취’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개개인의 ‘삶’을 이야기할 자리가 없다. 오직 기아로서 고통받는 자들로서의 삶, 종교로 투쟁하는 이들의 삶으로서만 이미지화 되어야 하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질 때에는 그들은 ‘삶’을 이야기 한다. 그들에게도 삶이 있었다. 일상이 있었다. 아이는 꿈을 꾸고 어른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운다.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하며 그 외에 수 백 가지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한다. 그들이 스스로 카메라를 든 자리에, 비로소 그 어떤 정치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온전한 ‘人生’으로서의 그들의 삶이 들어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상과 평범한 자들로부터 ‘주체적 목소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기술적, 미디어 환경적 인프라의 몫도 크다. 우선 많은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촬영을 할 수 있는 카메라를 갖고 있어야 했고, 그 촬영분을 올리도록 ‘유튜브’에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제작자들이 이런 기획을 하게 된 데에는 우선 카메라와 인터넷의 보급력이 거의 전세계에 도달했다는 판단 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실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192개국으로부터 영상을 받았다고 했지만 전세계에는 242여 개국이 존재한다. 나머지 50여 개국에서 참여하지 못한 것이 단순히 ‘그들이 관심이 없어서’라고 생각할 순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한계점이다.)
더 나아가자면 ‘유튜브’라는 뉴미디어를 무대로 하여 직접 자신의 삶을 찍어 올려달라는 요청에는 제작자들이 ‘뉴미디어’ 속 ‘풀뿌리 저널리즘(Grassroot Journalism)*’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직접 정보를 촬영, 기록하고 이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시민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 저널러즘을 실현하는 것이다. 풀뿌리 저널리즘 목소리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서 기울어져 있던 저울추를 일면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 <라이프 인 어 데이>는 넓은 의미에서 뉴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풀뿌리 저널리즘이 목소리 권력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그 행보에 동참하고 있다.
1시간 34분 56초. 그간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던 목소리들을 모두 접하거나, 71억명의 삶을 공평하게 다가루기엔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만큼 <라이프 인 어 데이>가 목소리 권력의 균형을 맞추는 데에는 수많은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시도 그 자체에 나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삶을 기록하고 정면으로 응시하겠다는 그 의도에도, 배제되어 온 목소리를 그 일부라도 직접 진술로서 존재하도록 하려는 그 노력에도, 뉴미디어 활용의 새로운 가능성의 증명에도 말이다.
*'Citizen Journalism'이라고도 하며 뉴미디어 시대에 대중이 정보를 수집하고, 보도하고, 분석하고, 확산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개념이다.
+물론 목소리의 권력을 갖지 못했던 수많은 국가들의 삶의 양식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도 크지만, 조금 다른 시선에서, 가장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스크린에 올려진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1시간 34분의 다큐멘터리 동안은 모든 평범한 일상들이 무대로 올라오는 시간이었다. 결코 영화와 어울리지 않았고, 그랬기에 스크린의 주목을 받을 수 없었던, 지극히 평범한 자들의, 가장 지난했던 ‘삶’. 영화는 그 ‘평범한 삶’에게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준 셈이자 인간 보편의 삶에 보내는 찬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