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스물 세 번째 해. 이 도시에 작은 소망을 빌다
어릴 적 나는 매일 같이 일기를 쓰는 아이는 아니였다. 학창 시절, 일기를 쓰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늘, “사는게 매일 비슷한데 매일같이 쓸게 뭐가 있어요.” 라며 투덜대곤 했었다. 일기 쓰는 것을 즐기지 않았던 만큼 다 쓴 일기장은 늘 방 구석 어딘가 팽개쳐 놓고 잊어먹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것들은 버려지지 않고 내 방 책꽂이 한켠에 남아있어 언젠가 성인이 되어 (아마 공부 빼고 뭐든지 재밌다던 시험기간에 그랬던 것 같다) 그 많은 일기들을 쭉 읽어보았었다. ‘사는게 늘 지루했다던’ 나의 일기는 참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니, 많은 흥미로운 것들을 ‘바랐다’는 것이 더 맞겠다.
아홉 살의 내가 바랐던 것은 “세상이 매일 매일 새로웠으면 좋겠다.”는 것이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해리포터처럼 즐거운 모험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열 한 살의 어느 여름 날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우리집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는 것’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파트가 세워질 것이라는 자리엔 내가 친구들과 땅따먹기를 하러 가던 작은 골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 두 살의 봄 날, 나는 용돈을 받으면 늘 찾아가던 뽑기 아저씨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후에 나는 용돈을 받으면 친구들과 어른처럼 카페를 가기로 했다. 그것이 초등학교 육학년 겨울이 마지막 일기였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이 모든 사라짐과 생성의 과정은 번화가로 유명해진 우리 동네가 프랜차이즈의 격전지가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카페, 옷 가게, 식당, 문구점, 식료품점까지 매끈한 브랜드의 간판이 걸려 있는 현재 우리동네는 좁은 골목길에서 조차 소상공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비단 우리 동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난 수십년 간 서울은 끊임없이 새단장을 했다. 낡은 건물들은 어느새 재개발 되어야 할 대상으로 떠올랐다. 작은 건물이 있는 자리에는 높고 웅장한 건물을 세우는 것이 더 발전된 도시처럼 느껴졌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욕망이 가득한 서울에 낡고 작은 것들은 좀처럼 살아남기 힘들다. 안타깝게도 작고 낡은 것들이 사라진 화려한 서울의 모습엔 이야기가 사라졌고, 누군가의 기억이 사라졌으며 문화와 전통이 사라졌다. 어딜가나 비슷한 아파트들과 비슷한 건물들과 비슷한 프렌차이즈들을 보고있자니 대자본의 소용돌이 속에 너의 일상과 나의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온전히 표현되지 못한 ‘나’의 공허한 허상만 남아 있다.
한 때 새롭고 독특한 문화를 선도하기를 지향하는 공간들이 있었다. 흔히 ‘홍대’나 ‘신사동 가로수길’이 그런 곳이였다. 처음엔 소박한 예술인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개성을 표현했다. 홍대에는 상업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인디밴드들이 모여 공연을 했었고 가로수길에는 개인 디자이너들이 백화점을 피해 자신이 디자인한 옷들을 판매했다. 그리고 이 두 곳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다. 당시 ‘작은’ 예술인들은 믿었다. 그곳에는 자본주의의 획일화에 대한 대안이 존재했다고. 그러나 머지않아 이 두 지역이 입소문을 타면서 자본의 물결이 이곳에도 흘러 들어왔다. 상업적 클럽과 프렌차이즈 카페, 식당이 들어서면서 두 지역의 본연의 색은 다시 사라지며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작은 것들은 다시 사라지고 큰 것들이 자리를 잡았다. 작은 것들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색도 사라졌다.
그렇게 서울을 탁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며칠 전, ‘골목상권이 뜨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서울에 좀 더 다양한 문화를 가져와보겠다는 이들의 시도가 GPS등 스마트폰 지도의 발달과 함께 많은 수요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은 도시에 작은 것들을 살려보려는 사람들이 있는 듯 하다. 언젠가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에 한 작은 카페에 들어갔었다. 카페인줄 알았던 그곳은 사실 책방이기도 했고 술집이기도 했고 영화관이기도 했다. 그곳은 사람들이 술과 함께 책을 읽으라고 제안하는 공간이며, 때로는 함께 본 영화나 책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가끔 저녁에는 하나의 주제로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한다는 주인 남자의 이야기는 나의 흥미를 끌게 했다. 그는 ‘세상에 조금은 다른 공간이 하나 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이 책방스럽지 않은 책방을 연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또 언젠가는 작은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여는 인디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서촌 골목 아주 깊숙이 자리안 그 작은 한옥에 꽤나 많은 이들이 둘러 앉아 노래를 듣고 갔다. 인디밴드의 노래는 대중 음악들과는 사뭇 다른 느린 곡들이였지만 이 소박한 한옥에 참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옛것이 많이 남아있는 종로구 일대는 새로운 문화와 예술의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프렌차이즈에 의해 쫓겨난 예술인들은, 혹은 소상공인들은 대자본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서울의 다른 곳들로 그 무대를 옮겨갔다.
더 나아가자면, 공간은 결국 삶의 방식과 연결된다. 다양한 공간이 공존할 수 있을 때, 그곳에 비로소 다양한 삶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서울에 작은 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나의 질문은 ‘서울에 작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다양한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 또한 ‘우리는 온전히 자신 스스로일 수 있는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런던에서 생활을 할 때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는데 내가 가면 항상 웃으면서 반겨주는 여자 직원(나는 어려보이는 그녀가 당연히 아르바이트생 이겠거니 했다)이 있었다. 그녀는 스물 한 살, 당시 나와 동갑이였다. 커피 몇 잔에 금새 그녀와 친해진 나는 그녀에게 나중에 하고 싶은 건 뭐냐,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냐 같은 질문을 물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녀의 대답은 조금 시원찮았다. ‘나는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아.’, ‘미래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적이 없어.’ 내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커피가 좋아 고등학교 때 부터 돈을 모아 이런 작은 카페를 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걸어 놓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며 커피를 만드니 어느새 카페에는 자신과 잘 맞는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더란다. 그녀는 그렇게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 낮에는 카페에서 그들과 대화하고 저녁 땐 그들과 템즈 강 앞에서 맥주를 마시거나 갤러리를 찾아 다녔다. 그녀는 자신있게 그녀의 이야기를 마치곤 ‘우리가 꼭 무언가가 될 필요가 있을까?’라고 나에게 반문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저런게 삶이구나. 원래는 저런게 삶이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살아왔을까? 생각했다. 내가 만난 작은 삶을 사는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다. 역사가 좋아서 유럽사를 석사과정까지 공부하고는, 베를린으로 넘어가 팁 투어가이드를 하는 영국인은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역사를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행복해 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쉰 다섯 살의 여자는 매일 웨스트엔드 근처 지하철 역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커피가 좋으면 카페를 열고, 역사가 좋으면 역사의 현장으로 가고, 노래가 좋으면 어디서라도 노래를 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커피가 좋아서 카페를 하나 차릴려고’ 라는 꿈은 너무 사소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모든 건물이 대기업의 본사처럼 화려할 필요는 없다. 모든 길이 매끄럽고 하얘야 할 필요는 없다. 모든 낡은 건물이 재개발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무명의 화가가 도시의 한 켠에 자신의 그림을 걸어둘 수 있다면, 골목길 한쪽 끝에 자신만의 카페를 만들 수 있는 도시가 된다면, 재개발이 아닌 재생의 힘을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런 도시가 우리의 삶의 공간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다양한 삶을 살도록 하는 지표가 되리라 믿는다. 그런 서울을 이룩했을 때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공존’의 의미를 실현하게 되지 않을까?
2016년 7월의 여름날, 서울살이 스물 두 번째 해. 나는 젊음을 빌어 앞으로 조금은 이상적일지 모를 소망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