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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Apr 29. 2017

한국에서도 ‘스포트라이트 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안 그랬던 적이 있었겠냐만은 이번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유난히 더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다섯 번째로 오스카에 후보로 지명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번엔 상을 탈 수 있는가에서부터 백인 위주의 후보 지명에 대한 #Oscar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태그를 단 비판까지 2월이 다가오자 시상식에 대한 다양한 주목이 집중되었다. 나 또한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여 1-2월에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이네이트 된 작품들을 꼭 몰아서 감상할 정도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관심이 컸다. 올해도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기 위해 장담컨대 모든 후보작들을 미리 보아두었다. 단 한 작품만 빼고. 바로 <스포트라이트>이다. 그런데 참 우연치곤 짖궂다. <스포트라이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모두 휩쓰는 순간 얼마나 허망하던지...너무 억울한 마음에 다음 날 아침 바로 달려가서 <스포트라이트>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2002년 보스턴 글로브에서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를 맡고 있는 ‘스포트라이트 팀’이 신부들의 상습적인 아동 성추행과 이를 묵인한 교회를 고발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영화는 마틴 배런 국장이 보스턴 글로브의 편집국장으로 부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틴 배런 국장이 신부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지목하며 이것을 취재할 것을 스포트라이트 팀에게 지시하게 된다. 스포트라이트 팀은 이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묵인을 발견하고 더 큰 시스템의 고발을 위한 조사를 한다. 1년 간의 취재 끝에 2002년 1월 최초 기사를 내게 되고 수많은 제보 전화를 받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사실 보스턴 글로브의 탐사보도 팀에는 영화 <스포트라이트>에는 나오지 않는 더욱 중요한 뒷 이야기가 있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교회의 아동 성추행 건을 첫 보도한 후 그 후로 총 600건의 후속 기사를 내었다. ‘이미 세상에 알린 사건에 왜 이렇게 많은 후속 기사를?’ 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탐사보도의 중요한 역할이 존재한다. 지속적으로 교회가 책임을 지고 있는가, 그 후로 문제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얼마나 해결을 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대중들이 한 순간의 이슈로 끝내 망각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목소리. 스포트라이트 팀의 일원이였던 샤샤 파이퍼(Sacha Pfeiffer)는 인터뷰를 통해 ‘스포트라이트 팀 그 누구도 이렇게 긴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나 한 순간의 폭로에서 끝나지 않았던 이들은 탐사보도 기자(Investigative Reporter)로서 스스로의 역할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탐사보도의 역할은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도 꾸준이 언급된다. “신부 말고 교회! 꼬리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고발해야지.” 라고 외치는 월터 로빈스의 목소리는 탐사보도의 핵심을 꿰뚫는다. 시스템이란 좀처럼 쉽게 보이지 않는다. 코끼리의 귀를 만진 장님이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장님이 코끼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끼리 전체를 더듬더듬 짚어보는 수 밖에 없는 것 처럼 체제를 고발하는 것 또한 이처럼 고된 작업을 수반한다. 스포트라이트팀은 몇 백권의 신부 인명등록부를 하나하나 짚어내리며 이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또한 쉽게 드러나 있지 않은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 문을 두드린다. 이들이 시스템을 고발하기 위해 걸린 취재 기간은 반 년이 넘는다. 몇 달의 긴 장정이 끝나고 이윽고 부정한 시스템을 발견하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탐사보도는 고발자로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한다. 


  사회가 은연중에 정상이라고 여기게 된 비정상적 체제에 대한 고발 또한 스포트라이트 팀이 보여준 탐사보도의 중요한 역할이다. 교회의 아동 성추행 사건은 외부인인 새로운 유대인 편집장 마틴 바론(Martin Baron)이 던진 질문이였다.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지만 아이를 학대하기 위해서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라는 영화 속 인권 변호사의 말이 보여주듯 아동 성추행 사건에는 수 많은 묵인이 있었다. <스포트라이트>의 공동 시나리오 작가 조쉬 싱어(Josh Singer)는 “우리가 사회의 일원(insider)라면 사회의 외부자(outsider)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즉 사회 내부에서 은연중에 합의된 ‘불합리’에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013년 보스턴 글로브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존 헨리(John W. Henry)에게 매각된다. 같은 해 마틴 배런 국장이 있었던 워싱턴 포스트가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에게 매각된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언론사가 스스로의 역할과 비즈니스 모델을 함께 충족시키지는 못한 것이다. 실패한 기업이 인수, 합병 될 때 가장 우선적으로 내려지는 조치가 바로 긴축 경영이다. 그리고 많은 북미 언론사들이 탐사보도팀을 가장 먼저 축소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탐사보도는 그 특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그에 비해 많은 수익을 얻기 어렵다. 언론사들은 가장 빠르게 뉴스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독자들도 ‘카드 뉴스’ 등 간편하고 빠르게 소비할 수 있는 뉴스를 선호하는 시대에 탐사보도는 최근 언론 트렌드에 어긋나 있다. 더불어 탐사보도는 많은 경우 새롭지 않다. 이미 몇 번 언급된 이슈를 더 깊이 조사해 더 큰 고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즉 투자해야 하는 돈은 많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수확은 적은 셈이다.


  탐사보도는 그럼에도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언론의 형태이다. 단편적인 사건들로는 찾아내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경제적 가치를 떠나 사회의 근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탐사보도의 취재 기간 평균 10개월. 이 긴 시간의 조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체제와 시스템의 고발은 몇몇의 조회수보다 훨씬 더 중요한 파급력을 사회에 가져온다. 그리고 이 파급력은 사회를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데 직접적인 영향력으로 변환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포트라이트’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 탐사보도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따로 있다. 바로 거대 권력 혹은 거대 체제와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제보자>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국가 전체의 이익과 명예라는 명목 아래, 국가가, 때때로 이장환 박사를 영웅이라고 맹신하는 국민들이 진실을 공개하려는 언론에게 가했던 수많은 방해와 폭력을 말이다.


  작년 미국에서 언론을 공부하면서 그곳의 몇몇 언론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중 국제탐사보도 단체인 ICIJ(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에 방문하여 한 편집장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를 했고 그는 자신이 몇몇의 한국 탐사보도 기자들과 일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탐사보도를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ICIJ에서 탐사보도를 진행하려면 현지 기자들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한국 기자들은 탐사보도를 하는 것에 종종 굉장히 조심스러운 입장을 표했다고 했다. ‘이 기업에 대해 폭로한다면 국가 경제 전체가 위험해 진다.’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정책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등과 같은 언급과 함께.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는 이 기자들의 말이 영화 속 보스턴 지역 추기경의 말을 연상시켰다. ‘도시가 번창하려면 위대한 조직이 함께 해야 합니다.’ 라는 그의 말 말이다. 물론 마틴은 ‘언론은 독립적이어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국에서 언론을 공부하고 있다면 그리고 탐사보도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탐사보도는 때로는 국가 전체의 경제에 해를 미치기도 하고 국민들의 신념에 비판의 돌을 던지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탐사보도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이 일을 시작한 것이지만요.” 


  우연인지는 몰라도 나는 같은 날 한국에서 취재를 했던 또다른 기자를 만났다. 그 기자는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취재하러 한국에 다녀왔었다고 했다. 그 당시 한국에 온 외신기자로서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왔었냐는 나의 당돌한 질문에 그는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언론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에 한국 기자들이 쓰지 못했던 기사를 그가 썼다. 한국에서 직접 보도할 수 없다면 외국에라도 보도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였다고 했다. 그래도 이제는 한국의 언론이 많이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냐며 그는 그가 한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없이 씁쓸해졌다. 


  87년, 기자들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보도할 수 없었던 시기로부터 지난 30년 간 우리에게 과연 어떤 발전이 있었을까? “우린 어둠 속에서 넘어지며 살아갑니다. 갑자기 불을 켜면 탓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죠.” 영화 속의 편집장 마틴 배런의 말이다. ‘스포트라이트’ 팀이 존재하기 어려운 이 나라에 우리가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 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았던 언론일까, 그들이 두려워 했던 거대한 권력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 모든 시스템이 존재하도록 허락한 대한민국 전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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