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지 Jun 24. 2017

#44 <꿈의 제인> 현대인의 르포

  르포는 꽤 자주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문학의 영역에서 르포는 타자가 간접 체험을 통해 서술하는 방식이 있는 반면, 당사자 자신의 목소리로 서술하는 방식이 있다. 물론 두 개의 목소리가 갖는 무게는 달라진다. ‘타자’에 의해 작성되는 르포는 타인의 삶을 대상화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전시하게 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안게 된다. 페미니즘 서사가 여성에 의해서 서술되었을 때와 남성에 의해서 서술되었을 때 그 목소리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요 남성에 의해 서술된 페미니즘 르포가 필연적으로 갖는 타자화의 위험이 그것이다. 영화 속에서 소수자의 재현의 문제가 항상 제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현훈 감독이 <꿈의 제인>을 만들며 가출 청소년들과 긴 시간의 인터뷰와 취재의 과정을 거쳤다고 하였으니 그의 영화는 또 하나의 르포인 셈이다. 한편 그의 영화에는 트랜스젠더 여성과 가출 청소년이라는 두 타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조현훈의 르포는 외부인에 의해 서술된 르포이다. 조현훈 감독은 트랜스젠더도, 가출 청소년도 아니기에 두 인물은 그에게 타자이며 대부분의 관객에게 두 인물은 소수자이자 외부인이다. 그러나 소현과 제인의 이야기는 단순히 ‘외부인’의 목소리로 서술된 타자의 이야기로 끝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의 영화는 확실히 그보다 더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영화는 트랜스젠더로서 살아가는 제인이 어떤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사랑했던 남자가 그를 떠났고 그는 어느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삶이 녹록지 않기에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 외에는. 그는 불행했고, 스스로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불행한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불행한 것이 그가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떤 부당한 현실 때문인지는 영화는 섣불리 단언하지 않는다. 그가 불행한 것은 그저 그가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외롭기 때문이다.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제인이 뉴월드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불행한 얼굴’은 뉴월드에 모인 모든 이들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극복할 수 없는 외로움에 직면한 소현이 있다. 이 말 한마디만으로 소현은 제인에게 사로잡혔고, 그 순간 소현의 환희에 찬 표정은 소현이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소현을 비롯한 ‘팸’의 아이들은 불행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배고프기 때문이거나, 부모가 없기 때문이거나 학교를 가지 못해서는 아니다. 그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를 모른다. 쉼터에 가지 않고 ‘팸’을 구성하여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은 결국 제인처럼 외로움을 기반하고 있다. 팸의 중심에 있는 ‘아빠’도 팸에서조차 주변부에 있는 ‘소현’도 지독하게 외로워서 사람을 붙잡아 두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너무나도 불행해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간간이 외로움을 잊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타인과 관계 맺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빠는 집과 폭력, 규율로 사람들을 붙잡아 보려고 했고 소현은 순종과 거짓말로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타인과 함께 있는 데 실패했다.


  "방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같이 있을 수 있는지."


  제인과 소현과 ‘팸’의 아이들은 모두 갖가지 이유로 불행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왜 저마다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이 불행한 만큼 사실은 이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그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고 또 쉽게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현훈은 특수한 환경을 배제하지도 않지만 서사를 끌어가는 결정적인 주제로도 사용하지도 않는다. 영화 속에는 그들의 특수한 환경보다 세상에 만연한 불행을 그들이 대하는 감정과 태도가 더욱 부각된다. 제인은 외롭지만 사람을 좋아했고 소현은 결국 불행하지만 살고 싶어 했다. 제인과 소현은 극복할 수 없는 외로움, 벗어날 수 없는 불행과 마주하는 이들의 불안한 감정을 제시한다. 제인과 소현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이다. 결국 제인과 소현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보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불행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다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마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성찰이다.


영화 <꿈의 제인> 스틸 컷


  그렇기에 <꿈의 제인>은 외부인의 시각에서 타자화된 르포가 아니라 바로 조현호 그의 자신에 대한 르포이자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르포가 된다. 스크린 앞에는 저마다 여러 가지의 현실과 여러 가지의 이유로 매일 삶에 ‘불행(Unhappy)’을 낙인처럼 찍고 사는 우리가 있다. 불행이 만연한 세상에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마 언젠가는 소현처럼 우리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행을 잠시 극복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계에 서투른 것은 소현이나 팸의 아이들만이 아니기에 결국 우리는 다시 불행해진다. 조현훈은 이들을 타자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현과 제인이 있던 자리에 관객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는 더 이상 소수자이기에 서글픈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삶을 견디기 힘든 인간 모두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그는 그의 르포를 확장시켜 타자화의 위험을 극복하고 영화 속 특수한 환경이 놓인 이들과 우리의 감정적 공감을 형성한다. 이것이 조현훈의 르포가 갖는 힘의 원천이다.


작가의 이전글 #43 <스포트라이트> 탐사보도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