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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문 Jul 21. 2020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믹스커피 타듯이 사는 것도 쉬웠으면

요즘 잠이 많아지고 부쩍 사소한 일상생활부터도 피곤해서 출근길이 힘들 때가 많아졌다. 저녁 먹고 잠깐 티브이를 보고 책을 뒤적거리고 누워서 신랑이 발마사지를 해주면 바로 잠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아침 샤워를 하고, 아니 사실은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침대에서 누워서 몸을 뒤척거리다 일어나 보리차를 마시고, 왠지 허기져 뭔가 먹어야 한다 생각을 한다. 요즘 새벽 먹방 패턴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조용한 거실과 부엌을 지나 고급지게 냉동실에 얌전히 빵칼로 잘라 냉동시켜 둔 데니쉬 식빵 '깁펠 식빵'을 프라이팬에 데워 꿀을 뿌려 먹는다. 아, 이 풍부한 버터의 맛, 이 여유로운 여름날 사치의 맛. 요즘 부쩍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먹고 나면 왠지 드디어 아침 샤워할 마음이 생겨 샤워를 시작한다.


아침 샤워와 저녁에 먹은 설거지와 아침을 먹고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신랑이 기어코 잡아 세워 영양제를 먹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거의 세이프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요즘 거의 이런 배고픈 패턴과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아침시간을 보내고 나면 출근시간은 당겨지지 않는다.


출근 후 "아, 믹스는 먹지 말아야지" 해도 믹스커피를 진하게 타서 얼음과 달그락거리며 내 오래된 흰 스타벅스 머그잔에 홀짝이고 먹다 보면 무겁고 숨 가빴던 아침의 시간이 다시 여유로워진다. 달달하고 익숙한 맛에 얼음을 넣어 만드는 이 간단하고 짜릿한 단 커피의 맛. 임신 초부터 임신 중에는 대개 커피를 마시더라도 디카페인을 마셨는데 이 믹스커피만큼은 악마의 맛이랄까, 여유의 맛이랄까, 지금과 다른 평범함에 대한 그리운 맛이기에 더 당기는 걸까?


몸이 무거운 이 여름날, 내가 출근하고 싶은 이유는 이 시원한 믹스커피 한 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말고 이렇게 출근해서 마시는 믹스커피를 난 끊을 수 없다. 먹지 않아야 하기에 더 끊을 수 없는 걸까. 임신 전에는 하루에 커피를 세네 잔도 마시고, 자기 전에 마셔도 끄떡없고, 커피가 맛있다는 커피집을 순례하듯 다녔는데 임신 후에는 왠지 커피가 당기지 않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디카페인 커피도 특별히 마시지 않았었는데,


임신 중기부터는 나의 일상이 희미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와 함께 시작하지 않는 아침이라니 너무 어제와 경계가 없다고 느껴졌다. 어제와 오늘의 흐릿한 경계선, 그건 나에겐 커피로 선명하게 경계 지어졌다.


내가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건, 봉지를 뜯어 컵에 쏟은 후 끓는 물을 부으면 끝나는 단순함과 그 끝엔 늘 원하는 같은 맛이 나온다는 점.

이렇게 믹스커피 타듯이 내 인생도 사는 것도 쉬웠으면 하는 주문과 함께 오늘도 커피를 탄다. 그리고 강렬한 카페인의 욕구와 함께 이 영화를 떠올린다.


영화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2003)

짐 자무쉬의 영화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2003)를 보면 하얀 커피잔에 풍미 있는 까만 에스프레소를 담아 각설탕 두세 개를 넣어 홀짝거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요즘 디카페인 커피와 믹스커피만 마시다가 이 영화를 오랜만에 보니 이 이상하게 약쟁이 같은 카페인의 기운에 각성되는 기분이 든다. 아마 그 영화를 처음 봤던 대학을 다니던, 영화를 공부하던 영화학도들은 대부분 그랬겠지만 이 앵글의 샷과 느낌이 얼마나 멋스럽고 좋았는지 따라 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영화였다.


'커피와 담배'는 단편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흑백 화면 속의 흰 커피잔과 까만 커피, 흰 담배연기와 등장인물들의 놀랍도록 지루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들이 매력적인 영화이다. ‘인디 정신’ 가득한 이 영화의 감독은 짐 자무쉬. 짐 자무쉬 감독은 장편영화를 만드는 틈틈이 1986년 미국의 대표적인 코미디쇼 ‘Saturday Night Live’를 위해 만든 콩트 형식의 영상물 <자네 여기 웬일인가?>를 시작으로 17년간 꾸준히 채워간 단편영화의 연작들로 <커피와 담배>라는 옴니버스 드라마의 형태로 완성했고, 마침내 장편영화의 형태로 영화를 개봉시켰다.


<커피와 담배>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의 모든 부분이 대화 씬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는 점과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아도 영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사실에 관객들은 새로움에 열광했다. 대화 씬으로만 이루어졌으며 한 공간이 영화의 전부를 차지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은, 당시로서는 과감한 용기이자 실험이었을 것이다.(최근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시리즈가 새로운 대화 씬의 영화로 박수받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스토리보드를 그리지 않는 감독이라니. 미리 찍을 걸 알고 찍는 게 싫다는 감독이라니 이 새로운 영화는 이 이상하고도 새로운 감독에 의해 나오는 것이리라.


 <커피와 담배>가 지금 같은 태교 시기에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나른하고 따분한 일상에 색다른 상상에 빠져드는 것을 영화가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땐 에스프레소 잔에 마시는 에스프레소 커피맛도 몰랐고, 영화 속 커피 중독자 로베르토 베니니, 스티븐 라이트가 손을 덜덜 떨며 에스프레소 잔들을 여러 잔 시켜놓고 약처럼 마시는 장면도 징그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믹스커피를 소중하게 한 모금씩 마시며 영화를 봤던 그때를 떠올리며 그 기분이 참 그립다. 그때의 기억과 미각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지금의 삶에 강렬한 시너지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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