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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문 Jul 21. 2020

'건축학개론' Architecture 101, 2012

신혼의 집을 정하는 법

신혼집을 정했다. 어디에서 살지, 아파트에서 살지 빌라에서 살지 우리 둘의 접점은 어디인지 고민했다. 앞으로 우리의 생활 반경은 어디면 좋을지 우리 예산에서 적당한 곳은 어디일지. 많은 고민과 스타벅스에서의 침묵의 시간과, 전세와 매매 중의 양자택일과,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새삼 막막함과 확신감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락가락했다.


방대한 부동산 정보의 바닷속에서 온갖 부동산 앱들을 부표 삼아 틈틈이 잠수해서 캐낸 정보의 해산물들을 꺼내어 확인해보며 서로의 얼굴을 보고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하는 이 생각과 결정들이 옳은 선택인지 앞으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의 생각과 현재의 자금상황과 서로가 가지고 있던 서로의 로망 계획들을 아주 솔직하게 아주 신랄하게 얘기하면서.


오랫동안 정보의 바다를 잠수하며 얻은 해녀병 (*물속 깊이 잠수했다가 주변의 압력이 감소하는 현상 없이 급격이 상승할 때 기압차 때문에 발생하는 병) 때문인지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가 갑자기 우울해졌다가 하는 감정 기복 현상이 꽤 오래갔다. 그때 전 남친 현 신랑이 현명하게 다독이면서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풀고 다음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지금도 그 정보의 바다 깊은 바닥에서 심해어와 함께 둥둥 떠다니며, 집은커녕 제 방 작은 침대 위에 누워있지 않았을까.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 신혼집은 내가 초등학교 때 신도시로 조성되어 이사 온 동네에 있다. 그땐 모든 것이 새 것이었는데 벌써 나도 34살이니 이 집도 나도 꽤나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건너편 단지인 신혼집은 아담하지만 깨끗한 단지이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역세권이고 대형마트도 스타벅스와 커피빈과 작은 할인마트도 목욕탕도 가깝고 초중고가 단지 바로 옆에 있는 신혼에겐 참 좋은 곳이다.


또한, 아파트 자체는 오래 됐지만 관리가 잘되어 있었고 특히 깔끔한 집주인 덕에 모든 것이 깨끗했고(심지어 부엌의 찬장들까지도) 햇빛도 잘 들어오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되는 2층 집인 신혼집. 다른 사람들은 저층은 싫다고 하지만 나는 10년 넘게 살고 있는 친정집이 2층 위치의 1층이라 그런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이 집에 들어온 순간 참 느낌이 좋았다. 거실 베란다 바로 앞의 유난히 동양화 속 나무같이 멋들어진 소나무와 상쾌한 새소리까지도 참 좋았다. 우리 매물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매물로 나온 지 얼마 안 된 깨끗한 집을 다른 사람 소개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려가 봤는데, 엄마와 와 신랑은 동시에 생각했다. "아 이 집이구나!"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신혼집을 계약하고 잔금까지 하루 남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신랑과 나는 우산을 나란히 나눠 쓰고 우리 2층 집 밑에서 한참이나 바라봤다. 빗속에서 불 켜진 집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그렇게 울컥하면서 뿌듯하다니 생전 처음이었다.


이제 저 집에서 우리가 신혼의 매일을 보내겠구나,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아침을 맞이하고 뜨거운 샤워를 하고 퇴근을 하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하루를 함께 마감하는 꿈같은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설렘에 가슴 벅찼다. 아직도 불 켜진 집을 올려다보는 우리 둘의 우산으로 거센 빗물이 쉬지 않고 쏟아지던 그 날의 빗소리를 잊을 수 없다.


신혼의 집을 결정하고 그 비를 맞고 돌아오며 이 영화 <건축학개론>의 대사가 생각났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이해를 시작하는 것 이게 바로 건축학개론의 시작입니다."


영화 <건축학개론>은 생기 넘치지만 숫기 없던 스무 살에 건축학과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피아노 전공 음대생 서연에게 반한다. 함께 숙제를 하게 되면서 차츰 마음을 열고 친해지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순진한 승민은 고백을 마음속에 품은 채 서연과 멀어지게 되고 서른다섯의 건축사가 된 승민 앞에 15년 만에 불쑥 서연이 나타난다.


승민을 찾아온 서연은 대뜸 제주도 고향에서 자신을 위한 집을 설계해달라고 한다. 첫사랑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서연의 집을 짓게 된 승민,  하지만 신축으로 고향집을 지으려는 승민의 설계안 앞에서 서연은 고민한다. 고향에서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모시려는 서연은 아버지와 자신의 꿈이었던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으려 뒤늦게 깨닫기에, '신축'에서 '증축'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다. 유명 연주가가 아니면 어떤가, 동네 교습소를 차려 피아노를 즐기면 또 어떤가.


'신축이 아닌 증축으로의 결정'. 그건 이혼 후 그 전의 삶을 모두 잊고 다시 시작하려했지만, 자신의 마음 그대로를 인정하며 지금의 토대 위에 새롭게 쌓으려는 결정이 아니었을까. 승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첫사랑이었던 그녀를 무조건 "썅년"으로 만들지 않고, 오해였던 그 순진했던 날들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또 자신의 새로운 사랑과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증축'으로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떠나고 싶었던 평범한 나의 동네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많은 고민의 시간들이 있었다. 나의 설계도면을 무조건 '신축'과 새로운 장소로 시작하고 싶었다. 철들 무렵부터 나는 살고 있는 곳만 작은 도시의 신도시이고, 큰 물에 가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학교도 직장도 서울이었기에 돌아오는 것이 스스로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익숙한 곳에서 더 새로운 가정의 토대를 만드는 '우리의 증축'이 더 기쁘고 행복이 점점 더 두꺼워지는 기분이다. 물론 가까운 엄마의 음식도 보너스이. 영화와 함께 다시 한번 결심한다.

우리의 행복한 '증축'을.


다들 무조건 떠나지 않고도 익숙한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증축'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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