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비점토로 만들어진 견고한 성
호텔방에 아직 페인트냄새가 배어 있지만 야즈드에 하루 더 머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어제 오후 야즈드 교외도 둘러 불 수 있었고, 오늘은 40여 킬로 떨어진 사르야즈드(Saryazd) 성에도 여유 있게 가 볼 수 있으니. 사실 사르야즈드 성(城)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J호텔 로비벽 한가운데 커다랗게 붙여놓은 황토색 사르야즈드성 홍보 포스터가 계속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가? 그 포스터는 내가 언제인가 영화에서 본 유명한 밤 성(城)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이란의 유명한 아도비점토(짚과 섞어 만든 진흙벽돌)로 만들어진 성을 처음 본 것은 이탈리아 영화 <타타르인의 사막(Il Deserto dei Tartar, Valerio Jurlini 감독, Ennio Morricone 음악, 1976도 제작)>에서 이다. 20세기 이탈리아 환상문학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디노 부차티의 동명 소설(타타르인의 사막)이 원작인데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 번역 출간된 바 있다.
이란 국경지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병풍처럼 둘러싼 하얀 설산들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2천 년 세월의 황토색 밤(Bam) 성(국경수비요새).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스토리보다도, 영화에 나오는 비토리오 가스만(Vittorio Gasman) 등 기라성 같은 전설적 배우들의 연기보다도, 그리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보다도, 이 영화의 배경지 밤 성에 더 관심이 갔다. 그것은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듣는 기분이었다. 망망대해나 황량한 사막에서 비로소 느껴지는 지고의 아름다움.
이 영화가 호메이니의 이란혁명 바로 직전에 운 좋게 촬영되었다는 사실(이후 이란에서의 촬영된 서방영화는 다시는 없었다)과 2003년 12월 이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2천 년 역사의 이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안타까운 뉴스 때문에 영화 속의 Bam 요새는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으로 더욱 내게 아직도 남아 있다.
Bam성이 사라진 지금(복구 작업 중이라는데)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야즈드 인근의 사르야즈드(Saryazd) 성은 아도비점토 건물로는 이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다. 만일 어제 방을 못 구해 야즈드를 떠났다면 우리는 이 성을 볼 수 없었겠지. 어제 아침 후드득 몇 방울 떨어졌던 빗방울은 역시 행운의 비였나 보다. J호텔 주인장에게 부탁하여 사르야즈드성까지 왕복택시를 25불에 대절한다. 자그마한 체구의 J호텔 주인장은 우리와 비슷한 연배인데 항상 단정한 양복에 근엄한 표정이다. 겉으론 깐깐해 보이지만 아무리 성가신 부탁이라도 내색하지 않고 성심껏 도와준다.
점잖게 생긴 택시기사는 보기와는 달리 엄청나게 차를 빨리 몬다. 그야말로 총알택시이다. 100킬로가 넘는 속도로 마구 달리면서 그래도 우리더러 안전벨트를 매라고 강권한다. 이번 중동여행에서 안전벨트 메라는 기사는 처음이다. 메고 싶어도 아예 안전벨트 없는 차가 대부분이었으니.
30~40분을 달려 허허벌판에 우뚝 솟은 Saryazd성은 그리 커지는 않지만 전형적인 이란식 아도비점토로 만든 성이다. Bam 성이 이란의 국경지대에서 적의 침입을 막는 군사요새인데 반해 약간 실망(?)스럽게도 Saryazd 성은 순수한 군사용이 아니라 행정 및 수비요새란다.
전시에는 시민들의 피신처이자 비상식량보관처로 사용되었고 평시에는 보석과 금은 등 귀중품을 보관하는 금고역할도 했단다. 사산조 때 지어졌다니 자그마치 1,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7,800제곱미터의 면적에 방이 무려 468개나 된단다. 서양의 성처럼 주위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출입구는 들었다 올렸다 할 수 있는 다리 하나이다.
성안은 수많은 창고와 방들로 이어져 있는데 온통 황토색 진흙성벽과 미로 같은 좁은 길들을 걷는 기분은 야즈드 골목을 걷는 기분과는 또 다르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 성 안의 자그마한 벤치에서 준비해 간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와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의 희미한 모습을 기억해내려 해 본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기사가 자랑스럽게 보여주려고 멈춰준 카라반 사라이와 깊숙한 곳의 원형 그대로의 세월이 묻어 있는 카나트도 둘러본다.
다시 야즈드로 돌아와 숙소 근처의 한 전통호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데 호텔 중정에 허벌나게 만개된 꽃들과 꽃잎이 떠다니는 연못은 작은 지상낙원 같다. 이 정원 앞에서 탄성을 지르지 않을 자 누가 있으랴. 아랍의 정원은 사막에서의 고단함을 달래는 쾌락의 정원이기도 했다는 메샹(정원의 역사)의 말이 기억난다. 사진을 찍고 다들 호들갑들이다.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리는 오후 6시 버스로 다시 이스파한으로 이동한다. 다행히 차편들이 예정대로 잘 연결되어 늦은 밤비행기에 오르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지난 일주일간의 숨 가빴던 여정들이 천천히 머리를 스쳐간다. 도착하던 날의 공항대합실에서의 고생스럽던 기억, 방을 못 구해 난감하던 기억들에 웃음 짓고, 이스파한의 자메모스크와 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를 못 본 아쉬움도 진하게 남는다.
그러나 이란은 우리에게 행복하고 즐거웠던 여행지로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페르시아의 빛나는 역사와 놀라운 문화유적들, 사막의 아름다운 경관들, 그리고 우리가 길가에서 만났던 따뜻한 사람들.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 다시 이 땅을 밟기는 힘들겠지? Khodahafez! 굿바이 이란! Khaste Nabashin!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