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무력에 의한 평화
이른 아침 아잔소리에 잠을 깬다. 예루살렘에서 아잔소리라니! 너무 뜻밖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민박집 L선교사에게 물었더니 아랍인지구의 모스크에서 나는 소리란다. 아랍인지구는 무엇이며 유태인지구는 또 무엇인가? 사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별다른 사전 공부 없이 왔다. 원래 여행계획에 없기도 했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뭔가 좀 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수십 년간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역사만큼이나 현실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나라로구나.
L선교사의 설명은 이러했다. 1948년 팔레스타인지역에 이스라엘이 제멋대로(?) 독립을 선언할 당시 이 땅에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이 약 95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 중 80%는 아랍 인접국으로 난민신세가 되어 흩어져버리고, 20%는 이스라엘 땅에 그대로 남는다. 지금 이스라엘 총인구수는 8백만 명 정도, 75%는 유태인이고 20%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들에게 합법적인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보장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빈곤층의 53%를 차지하고, 병역에서도 배제되며 교육과 취업에서 차별을 받는 등
이등국민으로 전락한 채 이스라엘 거주 아랍인(Islaeli Arabs)으로 살아가고 있단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2천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은 우리 땅이다'하고 유태인들이 밀고 들어 와 주인행세를 하니 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이것이 곧 오늘날의 중동분쟁의 핵심이며 쉽게 풀리지 않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오늘은 유대인의 사바트(안식일)이다. 그래서 전차도 버스(유대인지구)도 안 다닌다. 그런데 아랍인지구에는 버스도 다니고 장사도 한단다. 이게 무슨 말이지? 유태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고 아랍인의 안식일은 금요일이다. 그러니 토요일인 유태인 사바트는 무슬림과는 상관없는 날이다. 무슬림과 유태인은 완전히 따로 논다는 이야기이다. 민박집에서 조금 떨어진 아랍지구로 가서 다행스럽게도(?) 구시가로 가는 201번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니 검은 차도르를 두른 아랍여자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본다.
구시가 버스종점에 내리니 예루살렘성 8개 성문중 하나인 다마스커스문이 서 있다. 성문을 들어서니 오래된 좁은 통로길을 따라 각종 상점들이 양 옆으로 빽빽한데 온통 아랍사람들 세상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엘 왔는지 아랍 어느 나라엘 왔는지 아침부터 했갈린다.
아랍지구 곳곳에 중무장한 채 서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 그들이 아랍인들을 쳐다보는 매서운 시선에서 비로소 여기가 이스라엘임을 실감할 뿐이다. 마치 오래전 TV 드라마로 본 SF 영화 <X>에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여 도시 곳곳에서 중무장한 채 인간의 반란을 감시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Western Wall이란 표시를 보고 다다른 통곡의 벽 입구에는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고 한마디로 경계가 살벌하다. 유태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통곡의 벽 아닌가? 이른 아침이지만 통곡의 벽 앞에는 전통 유태인 복장을 한 유대인들로 북적인다. 오늘이 사바트라서 그런지 주변 분위기가 사진도 못 찍을 정도로 좀 숨 막힌다. 통곡의 벽은 워낙 사진이나 영상으로 많이 봐온 탓인지 별로 감동스럽지도 않다.
우리가 한참 찾아다닌 황금의 돔 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오늘은 유태인의 휴일이라 열지 않는단다. 아침부터 김샌 기분으로 성밖으로 나와 어설렁거리는데 멀리 감람산이 보인다. 그 밑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황금빛 돔이 아침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고 얼마나 오래된 무덤인지 헤아릴 수 없는 무덤들이 산 언덕을 덮고 있다.
정오가 가까워 올수록 태양은 뜨거워지고 걷기도 힘들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다시 아랍지구로 가니 사람들이 어느새 북새통이다. 예수님이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는 <고난의 길(Via dolorosa)> 표식이 보여 따라 걷다 보니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나온다. 나는 무식하게도 길가의 표시판을 보면서도 sepulchre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성묘'라는 단어의 뜻도 잘 몰랐다. 예수님의 '거룩한 무덤'이라고 했으면 금방 알았을 텐데.
그런데 예수님의 거룩한 무덤교회는 입구부터 별로 거룩해 보이지 않는다. 좁은 교회당이 너무 혼잡스럽고 무질서하여 마치 시장판 같았다. 관광객과 성지순례 온 단체신도들이 뒤섞여 다니기도 힘들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자리라는 도유석(기름부음의 바위)을 쓰다듬고 감격해 울고 기도하는 순례객들이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바쁜 사람이 더 많다.
예수님이 사흘간 안치되었다가 승천하신 자리라는 이디큘(작은 집)은 교회 안의 또 하나의 작은 교회건물인데 문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우리는 지레 겁먹고 입장을 포기한다. 왠지 우리같이 거룩하지 못한 신자는 들여다봐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다.
교회 안은 참 묘하다. 열렬한 기독교신자였던 로마제국 콘스탄티아누스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최초로 지었다는 이 교회는 수차레 파괴된 후 십자군에 의해 1149년 재건된 건물이다. 교회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교회내부도 시대별 건축양식이 뒤 섞여 있는데 대체로 느낌은 동방교회의 분위기이다. 교회 안에는 각 종파의 각각 다른 옷차림의 사제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동방교회 사제들의 옷차림이 더 많다. 순례객들도 서양교회 순례자보다는 러시아나 동유럽 순례자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 보인다. 다들 자기네 사제들 앞에서 설교를 듣거나 기도하고 있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이 교회는 가톨릭, 그리스정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등 6개의 기독교 종파가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싸우기도 하다가 지금은 공동관리 중이란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심히 좋아하지 않으실 것만 같다. 종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모습도, 자신의 무덤이 이렇게 시장바닥 같은 것도.
성묘교회를 나와 근처의 한 노천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는데 콜라 한 병과 치킨 샌드위치 2개의 값이 무려 82 세켈(33,000원)이다. 겁이 나 밥이나 제대로 사 먹겠나? 돌아가는 길의 아랍지구 한 빵집 앞에 차도르를 두른 아랍여인네들의 줄이 길다. 구수한 빵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이런 경우 무조건 따라 서는 것이 우리의 여행 요령 중 하나이다. 금방 구운 기다란 아랍식빵이 1개 5 세켈(2,000원). 먹어 보니 정말 맛있다. 빵 하나면 충분히 요기가 되고도 남겠다. 우리는 내일 점심때 먹기 위해 2개를 더 산다. 궁즉통이라 했던가? 물가 비싼 예루살렘에서 우리같이 가난한 여행객도 굶지 않을 방법을 찾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