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1453의 역사적 현장
Panorama 1453 역사박물관을 나오니 널따란 공원너머 그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3중 성벽(일명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기다랗게 진을 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처음 지어 AD 447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견고히 보강 완성된 이 성벽은 천혜의 해안 요새인 콘스탄티노플을 육지로부터 그 어떤 외적도 넘볼 수 없게 천년 동안 지켜 준 난공불락의 방어벽이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매메트 2세가 거대한 우루반 대포로 이 성벽을 뚫을 때까지는.
비잔틴 제국이 천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육지로부터는 이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이, 해안으로부터는 금각만과 보스포루스해협과 마르마라 해 3면으로 둘러 쌓인 천혜의 해안요새가, 그리고 더하여 비잔틴 해군의 강력한 비장의 무기 <그리스 불>이었다.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 구조 (출처:위키피디아)
하지만 세월은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것. 비잔틴 천년 제국의 지킴이었던 난공불락의 이 성벽도 지금은 거의 다 무너진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거늘....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성벽의 잔해만으로도 당시 이 3중 성벽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성벽에 이르기 전에 20미터 넓이의 물로 채워진 깊다란 해자(도랑)가 놓여있고 해자를 지나 첫 번째 성벽을 통과한다 해도 10m 높이의 외벽이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은 또다시 17m 높이의 높다란 내벽이 장대처럼 쳐 저 있고. 내벽과 외벽 사이에는 지하 통로로 이어져 있어 수비병들은 수시로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수십 미터 간격으로 망루가 세워져 있다. 과히 난공불락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음을 어찌하리, 창과 칼로만 싸우던 중세 시대까지야 난공불락이었지만 총과 대포가 등장하게 되자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인적도 드물고 잡초만 무성한 성벽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적막 속에 어디선가 1453년의 그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조금 전 1453 파노라마 역사박물관에서 재현된 그 함성들인가?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언젠가 무너질 운명이었다. 풍전등화처럼. 단지 메메트 2세가 그 시간을 단축하였을 뿐! 육지로는 8만의 대군과 우루반 거포로 이 성을 공격하고, 바다로는 기상천외의 작전을 펴 육지로 배를 금각만으로 이동시켜 마침내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53일 만에 함락시킴으로써 약관 22세의 메메트 2세는 Fatih(정복자)라는 칭호와 더불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위대한 정복자 메메트 2세가 이룬 오스만 제국의 위용조차 다 어디로 갔는가? 이 견고했던 성벽의 잔해 위에 서니 갑자기 고려 말의 시인 야은 길재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천년의 역사를 자랑해 온 비잔틴제국도 , 서양세계를 벌벌 떨게 한 오스만제국의 위용도 지금은 단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 있거늘... 영원한 것은 없나니. 오직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영원할 뿐.
우리는 테오도시우스성벽을 나와 다시 트램을 타고 에미뇌뉘선창가에서 내려 갈라타 다리를 건넌다. 다리밑 식당가에서는 요란스럽게 고등어케밥 표시판을 앞세워 호객 행위를 하고 있고, 다리 위에는 할 일 없이 낚시로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의 낚싯대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저 멀리 갈라타 탑이 보이고 다리 위 행인들의 발걸음도 한결 여유스럽다. 갈라타 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니 위스퀴다르 가는 배 선창가가 나타나고 안쪽으로 눈에 익은 듯한 어시장 좌판들이 여러 개 펼쳐저져 있다.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잡은 생선들인지 씨알도 굵고 싱싱해 보인다.
선창가에 제법 갯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AKIN BALIK이라는 생선 식당이 있다. 들어서니 현지인들로 가득하다. 메뉴는 오로지 튀르키예어로만 적혀 있다. 당연히 말도 안 통하지만 목마른 놈이 우물 파야지. 배고프면 손짓 발짓해 가며 다 시켜 먹기 마련이다.
우리는 폼나게 생선구이를 시켰는데 하나는 도미구이, 하나는 농어구이로. 그런데 정말 그 맛이 일품이다. 재료가 싱싱해서 그런가, 아니면 여기가 이스탄불 선창가라서 그런가? 바닷가 출신이라 이것저것 생선이라면 안 먹어 본 것이 없는데 도미구이와 농어구이가 이렇게 맛있었나! 최고의 점심이다. 분위기 좋고 맛 좋고. 코 앞에 갈매기 때가 까윽까윽, 오고 가는 배고동소리에 금각만의 푸른 파도소리까지 철석철석! 값도 참 얌전하다.(우리는 뒤에 이 집을 다시 찾았다).
멋진 바닷가 점심식사를 끝낸 후 우리는 바로 뒤편에 있는 갈라타 탑을 찾는다. 이스탄불 어디에서 보아도 쉽게 눈에 띄는 갈라타 탑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산 증인이다. 비잔틴제국 시대 제노바인들의 지중해 통상 거점인 이곳 페라 지구에 1348년 63미터 높이로 높다랗게 세워진 이 탑은 제노바인들의 감시탑이었다. 이 360도 높은 탑에 올라가면 바로 앞의 금각만과 보스퍼러스 해협 어느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1453년 당시 오스만 군의 동태를 가장 지근에서 지켜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룻밤 사이 금각만으로 옮겨진 오스만 함대의 깃발을 보고 가장 먼저 경악한 곳도 이곳이고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지켜보며 눈물 흘린 곳도 바로 이곳이었을 것이다.
상당히 언덕 바지에 있는 갈라타 탑을 계단을 따라 힘겹게 찾아 올라가니 주변은 온통 기념품점이 즐비하고 현지인 선남선녀들이 멋진 카페에서 봄날 오후를 즐기고 있다. 관광객들로 와글와글하는 술탄 아흐메트 지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탑 위에 꼭 올라가고 싶었지만 줄 선 사람들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우리는 다시 트램을 타고 카바타쉬 역에 내려 25E 버스를 갈아타고 루메리 히사르(Rumeli Hisar)를 찾아간다.
버스는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승객을 가득 태운 채 보스퍼러스 해협을 끼고 20여분 이상을 달리는데 바닷가 풍광이 실로 멋져 다리 아픈 줄도 모르겠다. 앞에 서 있는 잘생긴 튀르키예 청년에게 루메리 히사르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나요? 하고 물었더니 Rumeli Hisar? 그 뭐 하는데요? 하고 나보고 되묻는다. 이런 무식한! 동양에서 그것 보러 일부러 찾아온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모르냐? 외려 내가 대충 설명을 해주니 그제사 폰으로 폭풍 검색을 하고 법석을 떤 후 겨우 알아차리고 내리는 지점을 말해준다. 하기야 나도 행주산성, 남한산성이 어디쯤 있는지, 뭐 하던 곳인지 외국인이 갑자기 묻는다면 대답 못하겠지.
루메리 히사르(Rumeli Hisar). Rumeli는 유럽지역을 뜻하고 Hisar는 요새, 망루를 뜻한다. 메메트 2세가 1452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전 해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봉쇄하기 위해 소위 돌관 작업으로 4개월 만에 지은 망루 겸 요새이다. 해협 건너편 불과 600미터 정도 떨어진 아시아 쪽에는 벌써 수년 전 아나돌루 히사르(Anadolu Hisar)가 세워져 있었다.
해협 양 안의 두 요새에 대포를 설치해 놓고 지나가는 선박을 감시하고 정지 명령을 어기면 무차별 포격을 가하던 요새이다.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을 듯한 여러 문의 대포가 그때 그 상황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보스포루스의 해협 양 안을 꽉 죄였던 해양 요새 루메리 히사르(Rumeli Hisar)에 막상 들어서니 4개월 만에 지은 성채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고 꽤 넓다. 높다란 산등성이를 타고 잇대어 지어진 성채는 내가 보아온 여느 유럽 성채와도 비슷한데 단지 해안을 따라 천하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한마디로 루메리 하사르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끝내준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이고 발아래는 보스포루스를 내려다보며 저 멀리 보스포루스 대교를 배경으로 550년 세월의 고색창연한 성채가 걸려 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나가지만 지금도 5백5십 년 전의 그 무서웠던 대포를 의식하는 듯 거저 조용히 소리 없이 미끄러져 가고 있다. 방문자도 별로 없는 텅 빈 높다란 요새 언덕 한 낡은 벤치에 앉아 우리는 멍하니 해협을 내려다본다.
아직도 쌀쌀한 4월의 어느 늦은 오후, 해협을 내려보며 멍 때리기 한 시간. 550년의 긴 시간도 그때의 역사도 굳이 떠 올릴 필요가 없다. 따사한 햇빛을 쬐며 앉아 있는 이 순간 우리는 너무 자유롭고 행복하다. 우리 생애에 이런 행복한 순간이 자주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