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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May 17. 2024

우정 미션

1994년 어느 날.


지금도 제법 생생하게 기억나는 소소한 사건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학교는 동네에서 작은 규모였고, 각 학년당 7반, 반마다 약 40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는 15반 내외로, 반마다 50명씩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기도 했으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우리 학교도 작은 학교는 아니었다.) 매년 반이 섞이긴 했지만, 6년 동안 다닌 학교였기에 동학년 모든 학생을 알 정도로 서로 친숙해졌다. 나는 우리 반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리더 무리에 속해 있었지만, 사실 나는 그 무리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아이였다.

어린 나에게도 나는 그 무리 안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혼자 방황하며, 괜히 더 친한 척 친구들에게 잘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친구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있는 듯 없는 듯, 무리에 깊이 속하려 무던히 애쓰며 학교생활을 했다.

그 당시 우리 반에는 학교에서 싸움으로 유명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A였다. A의 무리는 남자들만 모인, 게임하고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집합체였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학교가 끝난 뒤 항상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지내는 아이들이었다. 그들 무리의 특징은 친구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이었다. 리더보다는 대장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A는 우리 반에서 대장이었고, 나와 교실 안에서는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담임 선생님은 늘 남녀로 짝을 이뤄 자리 배치를 해주셨고, 우리 반은 숙제나 미션 등으로 받은 점수를 매주 합산하여 그 점수로 1모둠부터 순서대로 앉았다. 나는 자주 A와 같이 앉았다. 둘이 학교생활하는 성향이 비슷했나 보다.

자주 A와 같은 모둠이거나 짝이 되면서 나는 내가 속해 있는 무리의 분위기 탓인지 이야기를 많이 건네고, 챙겨주며 우리 모둠을 보조하는 역할을 자진해서 하곤 했다. A는 싸움을 잘하는 캐릭터와는 정반대로 매우 내성적인 아이였다. 남자들 세계에서는 의리도 있고, 카리스마 있는 존재였는데, 사실 그는 여자에게는 매우 숙맥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가정에서 여자는 항상 챙겨주고 도와주어야 하는 고귀한 존재로 교육받았고, 여자를 친구나 동생처럼 가깝게 지내본 경험이 없어 방법을 몰랐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그를 무서운 존재로만 여겼고,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그런 A에게 무모할 만큼 나는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다가갔다. 앞서 말했듯, 나는 우리 모둠에서 외톨이가 발생하는 게 싫었고, 자주 짝이나 모둠에서 만나다 보니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A와 친해지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에서는 A의 여자친구로 소문이 났고, 나는 얼굴만 아는 누구의 친구에서 용감하고도 미스터리 한 커플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만 아니면 된다는 어른스러운 마인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쿨하게 학교에서만 친하게 지냈다. (서로 전화번호도, 어디 사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A의 무리 중 한 친구인 B가 나를 쉬는 시간에 교실 밖으로 불렀다.

"왜? 뭔데 여기까지 나오라고 한 거야?"

"야, 내가 할 말 있으니까 잘 듣고 A한테 전해."

"뭐야~ 그런 건 네가 직접 전하면 되지. 그런 걸 왜 시켜."

"내가 말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왜 나한테 그걸 시켜, 네 친구들 많잖아."

"아이씨, 그냥 전달해. 알았지?"

"...... 뭔데?"

"내가 중학교 형들한테 A에 대해 다 말했어. A가 우리 학교에서 애들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닌다고. 그래서 형들이 엄청 열받았거든? 토요일에 아마 A한테 가서 반쯤 죽여놓을 거야. 준비해 두라고 해. 아, 4시에 학교 뒤 골목 알지? 거기로 오라고 하고. 비겁하게 안 오면 형들이 쫓아가서 일 커지니까 꼭 오라 해. 앞으로 나나 다른 애들한테 까불고 무시하면 또 계속 말할 거라고도 하고. 알았지?"

"뭐라는 거야~ 걔가 언제 너 무시하고 까불었어. 걔가 그럴 성격이냐?"

"너는 몰라. 남자들은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전해. 제대로. 알았지? 너도 구경하려면 오고."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대략적인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나를 복도로 부른 친구는 중학교에서 노는 일명 날라리 오빠들에게 A에 대한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허위로 만들어 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 A에게 그들의 무리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가 거절당해 신경 쓰였던 찰나에 이 이야기가 화근이 되어 싸움의 이유로 자리 잡았으리라.

1:다수가 분명하다. 이건 무조건 지는 싸움이다. A가 위험했다. 내가 아는 A는 필요치 않은 싸움은 하지 않는다. 운동을 하시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고, 우리 사이에 지향하는 바가 있던 어른스러움(6학년이고, 곧 중학생을 앞둔 시기에 애들처럼 유치하기 싫었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처럼 꼭 무력을 행사해야 하는 때에만 싸움을 했고, 내가 알고 지낸 1년 동안 싸울 상황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래서 A가 또래 중 가장 키가 크고 말이 없는 아이라 겉모습만 보고 친구들이 싸움을 잘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도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런 A가 다수의, 그것도 툭하면 시비 걸고 싸우는 그 무서운 오빠들을 상대로 혼자서 싸운다니... 이건 불공평하고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A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그리고는 절대 가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 이야기가 나온 후로, 우리의 이야기는 온통 싸움 이야기였다. 나가게 되면, 안 나가게 되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나는 진지했다. 그리고 심각했다. 정의감이 불타오르고, 우정이 중요했다. 또 다른 친구의 시샘으로 인한 야비한 행동이 너무 큰 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주를 고민하며 지냈다. 쉬는 시간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복도에 나가 싸움이 일어날 장소를 보기도 하고, 노트에 주말에 만난다면, 안 만난다면, 나는 나갈 것인가, 안 나갈 것인가를 수도 없이 가정하며 일어날 상황을 글과 그림으로 적고 지우 고를 반복했다. 그런 내 모습이 담임 선생님에게도 보였나 보다. 한 번은 종례 후, 나를 부르셨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물어보셨고, 내가 아니라고 부인하자 가정사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빠와 요즘 주말에 뭐 하니?" "엄마가 어제저녁에 무엇을 해주셨니?" "동생이랑은 안 싸우니?" 하며 에둘러 질문을 하셨다. 당연히 선생님이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귀가했다.

그리고 다음날, 금요일이었다. 싸움 하루 전이다. 이젠 결정을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다. 내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심각했을 것이다. 어제 해답을 찾지 못한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내가 더 걱정이 되고 궁금하셨을 것이다. 갑자기 없던 학급회의를 시간표에 적으시더니 반 아이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건네주셨다.

"종이 다 받았죠? 이제부터 그 종이에 요즘 내가 걱정하는 것, 고민거리를 적어 볼 거예요. 이제 6학년 말

이 다가오고, 중학생이 되는 중요한 시기잖아요. 걱정거리가 뭔지 선생님에게만 솔직하게 말해 주면, 선생님이 하나하나 잘 들어보고 해결하도록 할게요. 솔직하게 적어 봐요."

교실이 조용했다. 아이들이 글을 적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고민에 빠져 글을 적고 있을 그때, 나는 내내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이게 진정 나와 A를 도와줄 유일한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종이에 싸움의 내막과 지금 내 고민을 적었다. 선생님이 이걸 보시면 분명히 해결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 길만이 싸움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종이 한 장이 담임 선생님 손에 전달되고, 모두가 수업을 마치고 하교할 즈음 나는 내 종이가 들어 있는 선생님의 노트북가방을 수차례 힐끗거렸다. '보시겠지?' '당연히 보실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주말이 가까워진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상담이 필요할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지혜를 믿고 싶었다.

"아빠, 나 고민이 있어요."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사실 학교에서 A가 싸움에 휘말렸어요. 중학교 형들이 A를 혼내주려고 해요. 토요일에 학교 뒤 골목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A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나에게 중요한 조언을 해주셨다.

"무엇이든 정의는 지켜져야 해. 네 친구 A가 맞다면, A는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했어도 도망치지 않고 맞서야 해. 물론, 힘으로 억울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도망가면 더 큰 괴롭힘이 이어질 수도 있어. 그리고 네가 네 친구를 구하려면 너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아버지의 말씀은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나는 결심했다. 다음 날 A와 함께 그 장소에 나가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 나는 A와 함께 그 장소로 갔다. 우리는 학교 뒤 골목에서 A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왜 왔어? 너도 다치고 싶어?"

나는 굳건히 말했다.

"우리는 도망치지 않아. 하지만, 이 싸움이 필요하다면 나도 함께 싸울 거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우리의 우정이야."

그날 우리는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A의 무리와 나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고, 더 이상의 싸움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A와 나는 친구의 우정을 지켰고, 그 후로 우리의 우정은 더 단단해졌다.

그 사건을 통해 나는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배웠다. 우정은 때로는 어려움 속에서 더 빛나고, 서로를 지켜주는 힘이 된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함께 있는 사람이다." – 조지 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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