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쁘다고?!

by 선이

비 오는 월요일 저녁. 이상하게 분리수거를 하는 날에는 꼭 날씨가 궂다. 이번에는 비가 쏟아지지 않고 아이가 분무기로 장난치듯 얼굴에 비를 흩뿌리는 느낌이라 플라스틱을 버리러 나가면서 자연스레 얼굴을 찡그린다. 얼른 정리하고 뛰어들어가려는데 "어머, 오랜만이야." 하며 1호 친구 엄마가 아는 체를 한다. 예상에 없던 상황에 약한 나는 애써 밝게 인사를 하고는 급한 대로 생각나는 이야기를 꺼내어본다. 마음 같아서는 인사만 하고서 휙 들어가고 싶지만, 가끔 연락도 하고 커피도 먹는 사이라 약간의 친한 척이 필요한 상황이랄까? 아무튼 그래서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생각났다며 본인 딸이 1호에 대해 칭찬을 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애가 그러는데, 1호가 남자애들 중에서는 제일 낫대."

"좋게 봐줘서 고맙네. 우리 둘이 언니 동생하는 사이인 거 알아서 그런가 보다."

"아니야. 남자애들은 대부분 말을 세게 하는데, 1호는 차분하고 배려하면서 말을 한대.

여자애들은 그런 거에 예민하잖아. 바로 알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얘기 듣고 너 닮아서 그런가 보다 했어."

"나? 나 차분하고 배려하는 그런 여자야? 전혀 아닌데?"

"뭘 아니야~ 예쁜 말들로 매번 나 들었다 놨다 하면서~"

연애할 때도 밀당을 하지 않는 세상 쿨한 여자가 난데, 내가 이제 와서 알게 된 지 몇 년 안 된 더군다나 만나서 이야기도 몇 번 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니 있을 수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칭찬해 주어 고맙다며 기다렸다는 듯이 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며 헤어졌지만, 뒤돌아 집에 들어오는 내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예쁜 말이라...'

그렇게 느꼈다니 뭐 나쁠 건 없지만 해야 되는 마무리를 하지 않은 것처럼 찜찜한 마음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분리수거장에서의 담화가 오래전부터 해결 못한 궁금증을 또다시 상기시켰다.

아마 첫 시작은 대학 때 있었던 그 일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많아 어딜 가나 정신이 없었던 걸로 기억되는 걸 보니 주말이었나 보다. 그날도 친구들과 길을 거닐다가 분홍색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점원이 나눠 주는 샘플을 받았는데,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며 들리는 외침에 흠칫 놀랐다.

"다녀오셨어요, 공주님."

"다녀오세요, 공주님"

공주님 소리에 당황하며 매장 안을 들여다보니 콘셉트가 공주풍인지 온통 분홍으로 꾸며진 화장품 진열대마다 분홍옷에 하얀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와 장갑을 착용한 아르바이트생들이 공주님을 연신 외치고 있었다. '공주님'이란 호칭은 낯간지럽다 못해 거부감이 들 정도였지만, 한창 분홍에 빠져있던 나는 취향 저격 파스텔색에 돌파민이 마구 생성되어 친구들을 꼬셔 그 화장품 매장에 들어갔다.

10년전 그 때를 재연하는 이벤트를 하다니!

이것저것 둘러보며 가장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들을 골라 계산대에 올리고 기다리다 계산대에 있는 비매품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유치 찬란하고 오글거리는 하트와 커다란 날개 문양으로 뒷면이 꾸며진 분홍색 손거울이었는데 아직도 그리라면 자세히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파는 것이었다면 그것이 얼마든 당장 살 기세였는데 비매품이라는 스티커가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세게 그었다.

"사장님, 이거는 안 파는 거죠~?"

"네. 이건 옆에 화장품 광고하려고 같이 비치한 거라 제품이 없어요"

"아.. 너무 예뻐서요... 혹시 이 광고 끝나고 나면 저한테 선물로 주실 수.... 안 되겠죠? 하하핫"

"어머! 학생 말을 너무 예쁘게 한다. 다들 그냥 달라고 하거나, 왜 안 파냐고 화내거든요.

학생처럼 예쁘게 말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가져가요. 학생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특별히 줄게요."

내 인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칭찬이었다. 나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다니! 누군가에게 특별한 노력 없이 칭찬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냥 툭 내뱉은 말이었고, 그랬기에 거울을 갖기 위해 생각을 하거나 흑심을 담아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그런 말 한마디가 바쁘고 정신없는 가게 사장님에게 감동이 되었단다. 당시엔 너무 얼떨떨해서 뭐가 뭔지 몰랐고, 공짜로 얻게 된 손거울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신나 하기 바빴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보부상 가방에 넣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의도한 바가 아니라서 어쩌다 당첨된 이벤트 같아서 그날 하루만 행복하고 끝났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분홍을 좋아하던 대학 새내기는 알록달록은 지겨워서 쳐다보기도 싫어 무채색으로 온몸을 휘감아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前유치원 교사이자 現 형제맘이 되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무채색 옷에 검정 머리끈을 질끈 묶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학부모 회의가 있는 날이라 안 갈 수는 없어 최대한 눈에 안 띄게 뒤쪽 사람들 사이에 그림자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날따라 예민한 주제가 나와 주변 사람들끼리 속닥거리며 분위기가 냉랭해졌고, 결국 한 학부모가 원장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치자 원장님이 울며 강당 밖으로 나갔다. 진행을 보고 있던 원감선생님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분위기를 이끌어 다 같이 긍정적으로 해결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게 원감의 역할인데, 당시 이제 갓 원감이 되신 선생님에겐 그나마 지켜줄 원장님조차 함께 계시지 않았다. 우왕좌왕 시장통 같은 분위기에서 5분 남짓을 고민했던 것 같다. 나서기 싫은데, 이 상황을 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무엇보다 무대 한가운데에 서서 어찌할 바 모르고 시선을 둘 곳을 찾는 당황한 前 주임교사이자 우리 아이 담임이셨던 선생님이 안쓰러웠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그래도 욕은 안 먹네. 나는 협박과 욕이 기본 옵션이었는데...'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배랍시고 오지랖을 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고민을 짧게 하고는 결국 손을 들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감 선생님께 원장님을 모시고 오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 사이 학부모님들께 이 상황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AI같이 짧고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그동안 애써 숨기고 있었던 내 존재는 직업병으로 인해 유치원과 관련된 모든 분들께 밝혀졌고, 그날 밤 나는 이불킥을 100번은 했을 거다. 아무튼, 그 회의를 마치고 귀가하려는데 원감선생님이 달려 나오셔서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님, 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잘 해결되었네요. 어쩜 그렇게 말을 예쁘게 잘하세요. 원래 말씀 잘하시는 건 알았는데, 매 번 어머님의 표현에 놀라곤 해요. 감동일 때도 많고요."

감사의 인사야 뭐 예의상 해 주시는 말씀이겠거니 하고 흘려 들었겠지만 '예쁘게'라는 말과 '감동'이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잘 해결되어 다행이라고 얼버무리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계속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그렇게 느끼셨을지.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답은 모르겠다. 내 기억상 처음으로 들었던 공짜칭찬(노력 없이 받은 칭찬이라 나는 공짜라 칭한다.) 은 그 이후로도 주위사람들에게 잊을 만할 때마다 한 번씩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응? 내가? 언제?" 하며 당황 혹은 민망해하는 것도 여전하다. 칭찬 알레르기가 있어 애써 상황을 바꾸려 노력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그 후, 습관처럼 집으로 돌아가며 내가 했던 말을 리마인드 해보지만, 딱히 나만 쓰는 단어나 말투 같은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나만의 테크닉으로 성장시켜서 지금쯤 강의를 나가든, 책을 쓰든 해서 대박이 났을 텐데 말이다.

외모로는 절대 듣지 못하는 '예쁘다'라는 표현을 듣다 보니, 그렇게라도 예쁘다는 소리가 듣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칭찬을 받으려 다른 사람들의 말 표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고 좀 더 신경 써서 말을 하게 된다. (물론, 흥분하거나 긴장이 풀리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여전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다가 좋은 표현이 있으면 내 입으로 직접 따라 해 보며 기억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진심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듣게 되었고, 자연스레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며 배려하게 되었다. 거기에 경험으로 얻게 된 '감사, 사과등의 인사는 미루지 말고 생각나자마자 즉시 해야 한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온 마음을 담아 솔직하게.'라는 인생 교훈이 덧붙여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로써 의도적으로 행복을 전달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얼굴이 예쁘고 싶지만...

오늘도 약에 취해 울다 잠들다를 반복하는 허무한 오전을 보내고는 맑아진 정신으로 오후가 되어서야 그동안의 일들을 수습을 하기 시작한다.

출근 직전까지 애들을 챙기느라 고생한 남편에게, 엄마가 아프다며 파충류샵은 나중에 가자며 아무렇지 않은 척 놀면서 힐끗힐끗 엄마를 살피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기대어주길 기다리는 내 지인들의 연락에 고맙다며 덕분에 행복바이러스가 퍼져 기운이 난다고 진솔하게 마음을 전달해 본다. 아직까지 언어의 마술사는 되지 못하여 많이 미숙하겠지만, 나만의 예쁜 말이 그대들에게 마음 깊숙한 곳 한 구석에 행복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P.S. 단언컨대 얼굴이나 몸매가 예뻐지는 건 일부러 다음 생으로 미룬 거다. 욕심이 과하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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