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작가

by 선이

나는 매년 겨울을 기다린다.
겨울이 되면, 우리 집엔 그림 한 장이 생긴다.

고운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낸 트리, 리본, 종, 크리스마스의 온기.
그림 아래에 작게 새겨진 그녀의 이름.
'홍디.'

그녀는 늘 말없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산타다.
직접 만든 엽서를 매년 빠짐없이 선물하는 사람.
이유도 설명도 없다.
그저 ‘올해도 그대를 기억해요’라는 마음이 스며든 한 장.
그 엽서를 받으면 늘 나도 조용히 웃는다.
그리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올해는 엽서가 없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을걸 알지만
아니, 아마 지금도 누군가를 챙기느라 바쁜 걸 알지만
나는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운영하는 수채화 클래스가 문득 생각났다.
'올해는 내가 엽서를 받으러 가보자.'
수업을 신청하고,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다.
처음엔 그림 수업이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녀가 만나고 싶었다.
그녀를, 그리고 그녀가 그려준 내 마음 한 조각을.


작은 화실 안은 물감 냄새로 가득했다.
그녀는 예전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맞아주었다.
반가운 만큼 할 말도 많았다.
하지만 그저 "보고 싶었어요" 하고 웃었다.
그 짧은 한 마디가 나에겐 엽서 한 장만큼이나 따뜻했다.


붓을 들었다.
무슨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다,
결국 나도 '겨울 엽서'를 그리기로 했다.
트리 대신 솔방울, 종, 붉은 리본을 얹어
그녀처럼 조용히 그려본다.
그림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 시간만큼은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기가 남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웅덩이가 생기지 않게 붓질을 하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처음부터 선생님처럼 잘할 순 없어."
그림을 하며 내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 집 식탁 옆 벽을 바라봤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아.
그 벽은 지금, 작은 갤러리다.
매년 받은 그녀의 그림이 고이 걸려 있다.
마치 내가 받은 작은 계절들처럼.

내가 그린 엽서도 그 사이에 걸었다.
물론 그녀만큼 예쁘지는 않지만,
그림에 담긴 마음만큼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올해도 나를 기억해 줘서 고마워.'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덮어주었다.

사실 이날 서울까지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사람 많은 기차역, 북적이는 거리,
아직은 예민하고 지쳐있어 작은 자극조차 버겁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가벼웠다.
버스 창밖 풍경이 예뻐 보였고,
작가님이 건네준 음료 한 잔이 고마웠고,
뭔가 ‘다시 괜찮아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늘 나를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대해준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척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꾹 기다려준다.
그런 사람들이 참 드물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올 수 있는 하루가 있어서,
이번 겨울도 잘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그려준 엽서를 나는 올해도 또 붙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올해도 당신을 응원해요."
그녀처럼, 말없이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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