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생 김숙자, 83년생 이지혜

by 선이


1950년대에 여자로 태어나 갖은 차별과 수모를 겪으며 학교 생활을 겨우겨우 눈치 보며 졸업한 두 사람이 있다. 그녀들은 졸업 후 취직한 회사에서 전형적인 보수적 성향의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그동안 집에서 느꼈던 것 이상으로 힘들고 눈물 나는 시집살이를 10년 넘게 하며 자신을 잃어버렸고, 그렇게 버티듯이 살림을 하며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왔다. 이젠 시간이 더 흘러 누구의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지만, 할머니임에도 아내, 엄마, 며느리 일 때보다 좋다는 두 사람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거리에서 각자 젊을 날을 보냈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강서와 강북으로 우연히 만나기도 쉽지 않은 거리에서 각자 열심히 살고 있던 중, 선선한 바람에 단풍이 예쁘게 흩날리는 어느 가을날, 서울의 한가운데에 있는 한 한정식 집에서 둘은 운명처럼 만났다. 어렵고 불편한 자리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보자마자 지난 삶이 자신과 비슷했음이 느껴졌다고 나중에 같은 말을 해 주었다. 그 눈빛과 인상에서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좋았고, 편했었노라고 마치 짠 듯이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는 걸 듣고는 꽤나 놀랐던 기억이 난다.




처음 만난 그날로부터 15년이 흘렀다. 두 사람은 3번 정도 만났을까? 13년간 연락 한 번 해보지 않고, 얼굴도 가물가물 할 텐데도 언제나 서로를 챙기는 두 분은 어떤 마음일까? 어떻게 이런 마음의 교류가 가능한지 매 번 보면서도 신기하다.


예상했겠지만, 그 두 여사님은 나의 시어머니와 친정엄마이다. 두 사람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서로의 자식을 잘 보이기 위한 마음 이상으로 진심을 주고받는 사이임이 분명하다. 명절이나 다른 개인적인 일들이 생길 때마다 서로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전화번호도 모르고, 제대로 얘기 나눠본 적도 몇 번 없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안타깝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게 매 번 너무나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장을 할 때면 고춧가루를 보내고, 친척에게 부탁해 참기름을 짜는 날은 어김없이 한 병 더 챙겨 전달하라 하신다. 어느 날은 어머님이 몸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하시게 되자, 300KM나 되는 거리를 반찬 열댓 가지를 해서 병문안을 찾아가셨고, 가족의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는 온 마음을 다해 손을 잡고 함께 울어 주는 모습 등을 보며 두 사람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렇게 사이에 끼어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보고 배운 것도 많지만, 받은 것은 훨씬 많다.

여느 아들보다 무뚝뚝하고, 제 멋대로인 이기적인 딸이자 먼저 연락 한 번 하는 일 없고, 오랜만에 오면 집에 갈 생각만 하는 속 보이는 며느리임에도 두 분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를 챙겨주신다.

이번 설에도 역시나 그랬다. 명절을 쇠기 며칠 전부터 온 가족이 감기 몸살을 심하게 돌아가면서 앓고 있었다. 자주 우리 식구들과 왕래하는 친정엄마 또한 감기를 한 달째 달고 사셔서 항생제에 위가 쓰려 통증을 느끼실 정도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딸이 편히 쉬게 아이들에게 전화해 할머니네 놀러 오라고 해 놓고는 갈비, 잡채, 식혜에 게장까지 명절 음식을 해서 애들 편에 보내 주셨다. 그리고는 이번 명절에는 따로 인사 안 와도 되니 시댁 다녀오면 집에서 푹 쉬라며 톡을 남기시는 센스까지 빠트리지 않으신다.

엄마표 명절 음식


시어머니도 만만치 않으셨다. 새벽 6시부터 일어나 나름 부지런 떨며 시댁을 향했는데, 이미 어머님은 차례상음식준비를 다 해 두셨다.

"왜 또 다 해 놓으셨어요. 제가 일찍 온다고 같이 하자고 했잖아요."

"혼자 있으면서 심심해서 사부작사부작했지. 차 타고 오는 사람이 고생이지, 음식은 금방 해."

손님방으로 쓰는 작은방엔 이미 이불이 단정하게 펼쳐져 있었고, 어머님은 언제나처럼 나에게 누워서 허리 좀 피고 쉬라며 방에 나를 넣어두시고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나가신다.

평소 같았으면 쪼르르 달려가거나 30~40분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왔을 텐데, 감기몸살약을 먹었더니 나도 모르게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졌고, 내 옆에는 아이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들어 있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왜 일어났어. 우리 목소리가 컸구나?"

"아니... 저... 얼마나 잤어요?"

"모르지. 근데 너 배 안 고프니? 뭐 좀 줄까?"

민망해하는 며느리에게 어머님은 아픈 아이 걱정하듯 몸을 살피고, 밥 걱정을 하신다.

차례를 지내는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차례가 끝나고 정리를 하자마자 집으로 얼른 가서 쉬라며 등 떠밀며 짐을 챙기라 하신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둔 과일, 참기름, 소고기 등 먹거리를 챙겨주시며 늘 하셨던 말씀을 빼먹지 않고 또 하신다.

"이거 하나씩은 꼭 엄마 가져다 드려. 엄마 잘 챙기고 있지? 식사도 자주 같이 하고~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래도... 응? 나는 괜찮으니까 엄마 잘 챙겨드려. 알았지?"

친정엄마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과 이번 명절에 잠만 자고 가는 한심한 며느리라 죄송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자 어머님은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내 등을 토닥거려 주신다.

다음엔 건강하게 더 일찍 오겠다며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핸드폰 알림이 연달아 울린다.

' 00 은행 입금, 시어머니'

' 몸도 안 좋은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집에 가서 밥 하지 말고 이걸로 맛있는 것 사 먹어.

내일은 병원 가서 링거도 맞고. 새해 복 많이 받고 얼른 나으렴.'

아이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요.. 여느 며느리보다 연락도 안 하고, 여우짓도 못하는 곰 같은 저에게 왜 자꾸 잘해주시는지 모르겠다며 엄마에게 어머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역시나 엄마의 레퍼토리도 시작이 되었다.

"매번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떻게 하니, 선이 네가 평소에 좀 더 챙겨드려. 엄마 거까지 다 드려도 되니까. 응? 평상시에 연락도 좀 더 하고. 딸이 없으시니 네가 딸노릇 좀 하고... 그래야 사돈이 마음도 정도 붙일 데가 생기지. 속상한 이야기 하시면 맞장구도 쳐드리고.. 엄마 말 무슨 말인지 알지?"




K-장녀로 지내며, 엄마가 늘 희생하고 인내하는 아내이자 며느리로 사는 것이 늘 못마땅했다. 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았다. 엄마 대신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슬그머니 엄마 옆에 서서 왜 엄마만 힘들게 이러고 있냐고 가서 얘기 좀 하라고 투덜거리며 도와드리기만 하던 지난날이 참으로 후회스럽다. 지금과 다른 그때의 상황에서 엄마는 남몰래 딸인 나는 손에 물 안 묻히게 하려고 동분서주 더 바쁘게 움직이셨던 걸 이제야 알았다.

이런 집이 어디 우리 집뿐이었을까. 엄마는 늘 자신의 세대가 끼인세대라 그런 거라 하신다.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엄마의 부모세대와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우리 세대에서 위아래로 평생을 눈치 보는 세대라고.

나라가 발전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가 일어 50년대생 여자들보다 80년대 여자가 많은 것을 누리고 덜 차별받고 산다는 것을 알기에 미안하고 안타깝고 고마운 마음이다.

엄마가 남동생과 똑같이 키우려 애쓰셨고, 어머님은 며느리 고생시키지 않으려 늘 바삐 움직이셨다.

본인처럼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마음을 알기에 나름대로 딸과 며느리로 해야 할 도리를 성심성의껏 하려 노력하지만 늘 두 분에게 받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엄마로서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번 명절에도 양쪽 집에서 분수에 넘치게 받으며 또 한 번 배우고 감사한 만큼 행복을 느낀다.


명절 연휴가 끝나고 남편과 맥주 한 잔을 하며 요 며칠간의 수고를 서로 위로하던 중에 남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여보. 우린 애들 장가보내면 명절이나 생일에 우리 둘이 여행 다니자.
애들 만날 때는 밖에서 만나서 밥만 먹고 헤어지는 걸로.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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