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에게 선물이 되었다.

by 선이

"선생님, 저 너무 힘들어요"

"힘드시죠. 이번 약은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이니, 이 약을 믿어 봅시다."


이번에 다섯 번째던가. 약을 갈 때마다 바꾸고, 올리고 했더니 뭐가 뭔지 가물가물하다. 이번 약은 부작용이 없이 잘 맞아서 용량을 늘려서 먹었다. 이 약으로 정착을 하는 줄 알고 좋아했건만 부작용이 없는 만큼 효과도 없어 문제가 되었다. 용량을 올린 3일 내내 우울과 분노가 온몸을 감싸고 있어 감정조절이 안 되는 탓에 수시로 울고, 구토하기를 반복했다. 결국엔 아이들까지 엄마가 불안해하며 울고, 변기통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약을 2주분이나 받아왔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3일 만에 다시 병원을 찾은 것이다. 제발 이번 약은 부디 나에게 맞는 약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테스트용이라 다시 줄어든 용량에 혹시 모를 비상용 신경안정제까지 추가로 받아 두툼해진 약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터벅터벅 병원을 나섰다.




"진료 끝났어? 나 지금 건물 앞에 있어. 이쪽으로 와."

남편이 어느새 차를 가지고 데리러 왔다. 오늘 아침에도 화장실에 한참을 있다가 온터라 남편이 마음이 쓰였나 보다.

"나 괜찮은데 뭘 또 데리러 왔어."

"오전에 시간 좀 남길래... 바람 쐬러 나가볼까 하고-"

바람을 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남편의 말에 또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에 눈물이 차 오른다. 안 되겠다. 급하게 창문을 내리고 창밖을 내다보며 머리를 굴린다. 어디가 좋을까? 뭐를 할까..?

"그럼 나 혼자 서점 다녀올게. 00 서점에 데려다줘. 거기가 넓고 좋더라."

"그래. 그럼 나는 거기 주차장에서 차 좀 손봐야겠다."

"아, 그럴래? 그럼 주차비 안내게 책을 사야겠네? 오랜만에 나한테 책 선물 좀 해야겠다. 오빤 책 안 읽을 거지?"

"어. 난 필요 없어. 자기 거 사."

"OK. 여긴 할인이 별로 안되지만, 오늘만 특별히 이곳에서 책을 사 주겠어!"

애써 씩씩하고 밝게 대화를 이끌어본다. 이러다 보면 언젠간 무뎌지고, 익숙해지고 나아지겠지. 그때까지만 조금만 고생해 줘, 남편.

이 은혜 살면서 차근차근 다 갚을게.




평일 오전 서점은 도서관보다 조용하고 아늑하다. 때마침 평소 좋아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의 ost가 나온다. 마치 날 위로라도 하듯 피아노버전으로 상냥하고 부드럽게 선율을 만들어 내 귀를 통해 마음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

'역시 여기로 오길 잘했어'

넓고 정돈된 책들과 너무 밝지 않게 조도를 낮춘 조명. 진한 갈색의 테이블과 빨간 줄에 매달린 예쁜 조명 속 노란 불빛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서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든다. 우선 현관 베스트셀러부터 찬찬히 훑어본다. 낯이 익은 책들과 새로운 책들과 눈인사를 하고 오른쪽 자판대를 기준으로 천천히 시계 반대방향으로 서점의 책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한때 열심히 보았던 자기 계발서, 숙제 같은 고전문학,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소설들과 내겐 너무 어려운 경제서들. 그리고 최근 들어 위대해 보이는 에세이들까지.

'어떤 책이 좋을까?'

아이들 책을 주문할 때마다 내 책도 슬쩍 하나씩 넣어 구입을 하곤 했지만, '선물'이라는 핑계를 붙이니 책 고르기에 더 고심하게 된다. 코너별로 왔다 갔다 하면서, 책들을 유심히 살피며 선물을 골라보기 시작했다.


선물이란 게 본래 받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걸 고르는 마음까지 전달되어 감동이 배가 되는 법이니까.


한참을 뒤적거리다 에세이 3권을 골랐다. 그중 2권은 도서관 찬스로 이미 읽어서 내돈내산을 하지 않게 되어 늘 장바구니에 있는 책이였다. 누군가 나에게 책을 선물해 준다면 너무 마음에 들어 할 책이였기에 특별히 골랐다. 책표지도 선물답게 고급 포장지처럼 예뻐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1권은 처음 보는 신작이었다. 아는 작가의 모르는 책. 그럼에도 알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책을 살필 때마다 보는 차례와 중간 챕터의 1~2장 내용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이렇게 술술 읽히는 문장들이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좋다. 빙빙 돌려서 어려운 말로 괜히 잘난 척하는 허세남보다 싫고 좋고가 분명한 쿨한 남자가 더 좋은 이유와 같달까.

계산을 할 때도, 잠시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을 때에도, 기다려 준 남편과 차를 타고 오는 순간에도 계속 책을 보며 행복했다. 이 예쁜 표지가, 이 담백한 문장이 나에게로 와서 선물이 되었다.


긴 하루의 끝에 좋은 책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날은 더 행복해진다. -캐슬린 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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