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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Mar 05. 2024

I am 다중인격자

<고요한 우연> 김수빈

<고요한 우연>이라는 책을 읽으며 영화 <인 사이드 아웃> 이 생각났다. 나는 이 영화를 참 좋아한다. 머릿속의 의인화된 감정과 우리 사회와 유사한 형상을 보이는 현실화된 뇌의 모습을 다양한 캐릭터로 독창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내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라일리의 뇌 구조가 일반적인 감정이라면, 라일리의 아빠와 엄마의 뇌의 모습은 여자와 남자의 생각의 차이를 너무 잘 살려서 웃음을 자아낸다. 이따금씩 이 영화를 자주 봐서인지 내 머릿속도도 영화 속 캐릭터들이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아이를 훈육하다 감정조절이 안되어 욱하게 되면 '버럭이가 또 열받아서 다른 친구들 밀어내고 홧김에 버튼을 눌렀나 보다, 얼른 다른 캐릭터들이 버럭이를 위로해 주길...' 하며 감정조절을 하곤 한다. 어린아이의 상상 같을 수 있지만 이 방법이 감정조절 하는데 꽤나 도움이 되어 이 영화가 더 좋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카피문구처럼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이라고 느꼈는데, <고요한 우연>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이 어쩌면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감정 캐릭터들처럼 한 사람의 다양한 성향을 각각의 인물로  만든 것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평범함의 극치로 나 혹은 우리 모두를 그려낸 주인공 수현과 그녀의 마음을 들어주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든든한 친구 지아. 보통의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이면에 걱정과 우울함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반장 지후와 존재감 없이 삶이 심심한 우연. 그리고 공부는 잘하지만 날카롭고 높게 벽을 치며 자발적 왕따를 자처한 고요가 모두 나였기 때문이다.(공부 잘하는 부분은 빼고.)  



 내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인지한 건 중학교 때였다. 우리 동네에서 학폭위가 많이 열리는, 흔히 말하는 문제아들의 집합체인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그것도 나 혼자. 정확히는 많은 학생들이 배정을 받았고, 아는 친구도 꽤 있었지만 초등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단  한 명도 같은 학교로 배정받지 않았다. 3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충격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중학교 배정이 적힌 쪽지를 받고 충격에 휩싸인 나를 위로하며 걱정하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친구의 '어떻게 해~'라는 공감에 끝내는 울음보가 터져 운동장 계단에 앉아 한없이 울었던 그때,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중학교 입학식 하던 날, 반 별로 줄지어 운동장에 서 있는 내 눈에는  깻잎머리에  교복을 수영복처럼 딱 붙게 입은 선배들이 보였다. 하이에나처럼 신입생 주위를 서성이며 마음에 드는 이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이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X언니, X동생이구나' 하며 쪽지를 받은 아이들의 설레어하는 표정을 티 내지 않으려 슬쩍슬쩍 보았다.

'선택이 되면 어떡하지? 나도 날라리가 되는 건가?'

'선택이 안되면, 나는 빽이 없는 거니까 안 좋은 건가? 선배언니나 쪽지 받은 애들한테 찍히면 어떡하지?'

입학식은 두려움 섞인 걱정만 하다 끝이 났다. 입학식 이후, 가족들과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끊이지 않던 걱정 끝에 굳은 결심을 했다.

'중학시절은 조용히 유령처럼 살자'

 예상대로 쪽지를 받아 든든한 지원군을 등에 업은 친구들은 반에 서 활기를 쳤고, 그들의 행동과 말 하나에 위축이 되고 눈치 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같은 13세 여중생인데도 그들에게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어른에게 대하듯 공손하게 말하는 내가 싫어 밤마다 이불킥을 수만 번 했다. 벗어날 수 없는 교실 안에서 나름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벽을 치고 날카롭게 굴기도 했지만, 여러 상황에 엮이는 것조차 싫어 결국은 자발적 왕따의 삶을 선택해 지냈다. 그러다가 외롭고 답답해서 당시의 SNS인 인터넷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고, 그 안에서는 소심하고 존재감 없는 슬픔이가 아닌 누구보다 밝고 적극적인 성격의 기쁨이로 살았다. 그런 내가 좋아 보였는지 부러워하는 이도 있었고, 고민을 토로하며 도움을 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이중적인 삶이 당시에는 많은 위로와 용기가 되었고, 지금도 인터넷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를 다르게 살며 그 안에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힘들고 어려운 마음을 해결하기도 한다.


 옛날엔 혈액형이, 요즘은 MBTI가 그 사람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나의 성향이나 이미지를 무엇으로 표현하든 간에 예나 지금이나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건 일맥상통한다. 또 그 타인이 누구냐에 따라 내 MBTI나 혈액형은 다르게 예측되는 것도 ctrl C + ctrl V 한 것 마냥 똑같다. 예를 들면, 3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죽마고우 친구와 이제 막 알게 된 직장 후임에게 내 MBTI를 유추해 보라고 해보라고 해보자. 그게 어렵다면, 자주 만나는 지인과 가족을 비교해 봐도 된다. 예상컨데 분명 서로 각기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 캐릭터는 매번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MBTI가 E라고 항상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지 않고, 대문자 I라고 해도 집에만 있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가지고 있던 다양한 캐릭터 중 하나를 꺼내 수현이 되기도 하고 고요가 되기도 한다. 나는 주로 말이 퍼지지 않을 만한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곳이 마음이 편해서 그때에는 지아나 정후가 되고, 사람이나 오고 가는 말들이 많은 곳에서는 이것저것 신경이 쓰여서 고요나 우연이 되곤 한다.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러하듯, 누구나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은 있기 마련이다. 사연 없는 집이 없듯이 고민 없는 사람은 없다. 지후가 SNS에서 본인의 상황과 그로 인한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대나무의 숲이 있어 큰 위로를 받는다며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난 격하게 동의했다. 깊은 고민은 남편에게도, 엄마에게도 꺼내지 않게 된다. 나를 걱정할까 봐, 나의 흠집을 들키기 싫어서 일수도 있고 괜한 자존심에 어두운 부분을 가리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막론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 고민을 훌훌 털어놓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유명 철학원이나 명사의 혜안보다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우리의 고민 대부분은 해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공감을 바라는 것 같다. 그러니 옛날에는 대나무 숲이, 요즘에는 보배드림이 인기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다양한 나를 마음껏 활용하고, 고민은 품지말고 꺼내 버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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