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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Apr 02. 2024

저 녀석의 관찰일지

오늘도 하소연

따라라라라~따라라라라~따라라랄라라라라~

저녁 9시. 알람이 울린다

"이 시간에 무슨 알람이야? 누구 거야?"

핸드폰 액정화면에 무의식적으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쉼 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던 남편이 놀라 소리친다.

"아~! 내 거 내 거! 나 지금 나가야 해!!"

1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외투를 찾아 입고는 핸드폰을 챙겨 부리나케 현관 밖으로 뛰어 나간다.

"쟤 어디가? 연애해?"

"데이트를 잠옷바람에 나가는 사람 봤어?"

"그럼 이 시간에 어디가?"

"달 관찰 하러."




6학년이 되자마자 담임 선생님이 내 주신 첫 번째 숙제는 <달의 관찰 일지>를 쓰는 것이다. 아마도 과학시간에 자전과 공전에 대해 배우면서 달의 모양 변화에 대해 학습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 덜렁이는 매일 놓치기 일쑤여서 오늘부터 알람을 맞춰놓기로 했다.

"엄마, 오늘도 달이 안 보여. 구름이 다 가렸어."

"어디서 봤는데?"

"아파트 놀이터"

"거기 말고 정문 앞으로 가봐. 정문 앞 편의점 알지? 거기 앞에서 오른쪽 하늘 보면 보일 거야."

"어~ 알았어. 엄마 전화 끊지 마. 나 지금 뛰어가는 거 들려? 엄청 빠르지!"

달을 보러 간 건지, 통화를 하러 간 건지... 수다쟁이 이 녀석은 나가자마자 전화를 걸어 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나는 통화설정을 스피커폰으로 변경을 하고 타이밍에 알맞게 "응"을 외치며 내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여기도 안 보여. 오늘 구름이 달을 가렸다니까! 엄마가 나와서 볼래?"

"아휴~ 너는 왜 그거 하나 못 찾아가지고.. 거기서 기다려 금방 나갈게."

내년에 중학생이 될 녀석이 혼자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리자, 옆에서 누워 핸드폰만 하던 남편은 불똥이 자신에게 튈 거라는 것을 예감했는지 자발적으로 본인이 나갔다 오겠다며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결혼 생활 10년이면 곰 같은 남편도 눈치란게 생기나 보다.

아빠 곰과 순수 그 자체인 아들

3분 후. 부자는 달이 없는 이유를 각자 나름대로 의견을 내며 시끄럽게도 들어온다. 동네 사람들에게 달 탐색을 다녀온 걸 방송하는 것 마냥 아파트 꼭대기층 사는 주민들까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얘기하는 건 언제쯤 고쳐지려나. 소란스러운 소리에 맨발로 현관문으로 달려 나가 그들을 향해 입술에 검지 손을 대며 미간을 찌푸린다.

"알았어, 알았어. 조용히 할게. 그런데 엄마!! 진짜 없다니까? 아빠도 없대."

"알았으니까 들어와서 얘기해. 동네사람들이 욕하겠어."

"응. 그런데, 엄마. 내 생각은 미세먼지 때문 같은데, 아빠는  구름 때문에 안 보여."

이 눔의 자식은 또 내 얘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아들 전문가 최민준 님이 분명 아들의 눈을 바라보고 하나만 정확하게 말을 하면 인지한다고 했는데 왜 안 되는 건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고 싶어진다. 그동안 당신의 강의와 책을 보며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필터링을 해서 본인이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픽하는건지 설명 좀 라고. 그리고 해결책 좀 달라고 말이다.

"설마 미세먼지겠어? 구름이겠지."

"아무튼 안 보이니까 오늘도 안 보인다고 써야겠다."

"아휴~ 달 관찰일진대 왜 달은 없고 매번 글씨만 적니;;"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해, 거짓말로 쓸 순 없잖아. 여기 안 보여? 솔직하게! 사실대로! 적습니다! "

"어. 그래. 잘했다."

"그렇지? 나같이 매일 기록하는 애들 흔치 않다고. 역시 난 천재야!"

천재가 그럴 때 쓰이는 게 아니라고 일장연설을 퍼붓고 싶지만, 어차피 듣지 않을 알기에 참을 인자를 새기며 입을 다문다.





 1호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거실 칠판에 붙어있는 관찰일지를 살펴본다. 2주 남짓 기록되어 있는 일지에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그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까먹음"

"깜빡함"

"비 와서 못 봄."

"달이 보이지 않음"

"구름 때문에 달이 안 보임."

달을 찾았으면 모양을 따라 그린 후, 색칠하라는 관찰 방법 설명글을 보이지 않는지 그나마 그린 달 2개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만 여러 개 그려져 있었고, 나머지 칸은 달을 보지 못한 이유들을 설명대로 참으로 솔직하고, 사실되게 적어놨다. 맞춤법까지 틀려가면서.

"저녁에 안 보이면 아침에 보러 갈까?"

"아침에는 해가 뜨잖아."

"원래 달은 하루 종일 뜨는 거야. 밝은 해 때문에 달이 잘 안 보일 뿐인 거지."

"그럼 안 보이는 건 똑같네."

"해가 뜨기 전에 보러 나가자는 거지. 너 어차피 일찍 일어나니까 일어나자마자 나가면 되잖아."

"아~ 그건 생각만 해도 너무 귀찮은 일인데?"

"이번 주는 아빠가 새벽출근이니까 출근하면서 사진 찍어 보내줄게."

"아싸~ 역시 아빠가 최고라니까~!"

"그럼 그게 네 숙제니?? 아빠 숙제지??"

"왜? 사진으로 관찰하고 그리는 건 난데?"

하아.. 신이시여. 제가 이 아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 못 키운 겁니까. 학습목표를 파악하는 일이 초등6학년한테 그리 어려운 일인 건가요? 아니 그러면 그동안 배움 노트는 대체 어떻게 쓴 거냐고요. 이번 주는 아빠찬스를 쓴다고 치고, 다음 주는 또 어떻게 꾀를 내어 일지를 작성할지 벌써부터 분통이 터집니다.

그리고 불안하고, 무섭게도 새벽 5시에 제가 혼자 후드점퍼를 모자까지 쓰고 나가 달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는 건 왜 그런 걸까요? 상상은 상상일 뿐이니 오해하지 않는 게 좋겠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긴 사람은 대체 누굴까? 그야말로 진정한 천재임이 분명하다. 새벽 4시반에 일어난 나는,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고는 혼자 쓸쓸히 슬리퍼를 신고 아파트 주변을 서성인다. 나온 김에 활짝 핀 벚꽃도 찍고, 아무도 없어 조용한 놀이터에서 상쾌한 새벽 공기도 마셔보며 달 관찰이 아니라 부지런하게 산책 나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차피 이럴 거면 내일은 아예 뒷산을 다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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