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과 꽃놀이를 간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군대를 지원한 것과 같다. 한마디로, 못할 짓이라는 거다. 차라리 동네 산책이 낫지 힘들게 예쁜 장소에 가서 차와 사람에 치여 짜증이 난 남자들 틈에서 인생사진을 건질리는 만무하고 그들과 사진을 찍느니 지나가는 어리고 잘생긴 청년에게 사진 좀 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이것이 남자 셋과 13년째 살면서 터득한 <형제맘이 포기해야 하는 것 100가지> 중 하나이다.
지난 주말은 벚꽃이 만발하는 벚꽃 주간이었다. 게다가 햇볕은 쨍쨍, 바람은 선선하니 날씨까지모든게 완벽한 날이다. 이런 날 집에만 있을 수 없다.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꽃구경을 가자며 가족들을 꼬셨다. 주말이면 방바닥과 하나가 되어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널브러진 그들을 일으켜 세우기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그래도 결국 양치를 시키고 옷을 입혀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부여 정림사지 박물관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벚꽃 맛집이 많지만 굳이 부여로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에 말한 자원입대를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이 무언가 볼거리, 할 거리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거리는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된다. 가까우면 귀소본능이 일어나 남편이 차에서 기다린다는 핑계로 '집에 가자'를 온 몸으로 표현할 것이고, 거리가 너무 멀면 차에서 핸드폰을 하겠다는 두 녀석이 난리를 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부작용을 막을 수 있고 벚꽃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을 따져가며 장소를 찾아낸 나 자신이 참으로 기특하고도 짠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10대 둘, 40대 하나 ...아들 셋을 키웁니다
아침형 가족인 우리는 오늘도 오픈 시간보다 일찍 도착을 했다. 직원보다 먼저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보는 재미는 해 본사람만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일 것 같은 행복감과 경비원에게 걸릴 것 같은 긴장감, 그리고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움까지! 아직은 찬 아침공기를 마시며 우선 정림사지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머! 너무 예쁘다~~~~~!"
주차장 뒤편 전체가 벚꽃이 활짝 펴서 바람에 벚꽃 잎이 날리는데, 눈이 내리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꽃잎은 흰색인데 왜 분홍빛이 어린것처럼 보이는지.. 파란 하늘과 너무 잘 어울린다. 아침이라 아직은 기분이 괜찮은 2호를 꼬셔 점프샷과 전신사진을 찍어본다. 1호가 사춘기가 끝날 때까지 2호는 사춘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2호까지 저렇게 예쁜 벚나무 밑에서 검정옷을 입고 저승사자처럼 굳어있는 표정으로 서있는 이가 한 명 더 생기는 건 생각만 해도 민폐다.
"어? 오픈했다! 가자"
담당 직원이 이제서야 자물쇠 구멍에 키를 넣고있는데 그걸 또 캐치해서는 우다다닥 달려가기 시작한다. 남편은 어디에 있었는지 아이들 소리에 자연스럽게 입장을 한다. 저 사람이야 말로 진짜 저승사자일지도...
오랜 시간 기다렸던 박물관 견학은 역시나 30분 컷이었다. 모든 버튼을 눌러보고, "나 이거 알아" "이것도 봤어"를 인사처럼 스치듯 하며 지나가는 아들 녀석을 붙잡아 설명을 해보지만 역시나 내 입만 아프다.
그래. 그럼에도 뭔가 얻겠지. 이 많은 것들 중 하나는 기억에 남겠지. 박물관에서의 에티켓만이라도 지켜달라고 애원을 하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예쁜 연꽃이 그려진 기와를 보고 어떻게 그냥 아는 것이라며 지나칠 수가 있지? 이 화려한 옷과 장식은 또 어떤데? 남자 셋이 지나간 곳마다 놓여있는 작품 같은 유물들을 살피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전시관 밖에서 "아하하하하하" 큰 웃음소리가 들린다. 우리 애들이다!
이번에도 전시관 하나를 제대로 못 보고 나와야겠다. 아쉽지만, 지금은 저 소음을 끄러 가는 게 우선이다.
"조용히 해! 여기도 박물관 안이야."
"엄마, 이거 해봐. 엄청 웃겨."
"아빠는 아낙네래! 완전 딱이지."
회사에서 일이 있어 몇 달 쉬고 있는 남편은 돈 버는 마누라를 대신해 눈치껏 본인이 할 수 있는 집안일(설거지와 빨래 정도)을 하고 있었기에 아낙네가 딱이긴 하다.
"이게 뭔데, 아빠가 아낙네래?"
"이거? 전생을 알려주는 기계래."
"나는 왕 나왔다? 내가 제일 높은 거야."
"그래? 그럼 엄마도 해봐야겠는데?"
랜덤으로 나오는 걸 텐데 애들 앞이라서 인지 너무 떨린다. 아낙네보다 나쁜 게 뭐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면 적어도 한 달은 놀릴 것 같은데...
"엄마는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님이었던 거 아냐?
"엄마는 이 씨가 아니잖아."
"전생에는 이 씨였나 보지."
다행이다. 아이들이 역사 속 인물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멋있게 생각하는 '장군'이 나왔다. 남자/여자는 그들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저 멋있으면 장땡이다.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진짜 전생에 군인이었나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그럼 진짜 남편은 전생에도 집안일을 하며 투덜거리고 있었을까나? 상상만 해도 너무 웃기다.
"1호는 왕이었고, 2호는 뭐 나왔어?"
"나는 좌평. 근데 그게 뭐야?"
"역사책에서 무과랑 문과 있는 거 알지? 문과에서 1품이 좌평이야. 2호랑 진짜 잘 어울린다. 너 책 읽고 토론하는 것도 잘하고, 문제해결도 잘하잖아."
"아~ 삼국지에서 나오는 제갈량 같은 거구나. 좋았어~!"
"그러고 보니 이거 진짜 잘 맞네. 웬만한 점쟁이보다 용한데?"
"우리 아빠 회사 가고 나면 다시 와보자. 그땐 아빠 뭐라고 나오는지."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멋진 탑과 화려한 유물이 아닌 전생 맞추는 기계가 남자 셋 뿐만 아니라 나까지 매료시켰다. 진짜 남편의 복직 후에 와서 다시 해 보면, 남편 직업과 관련된 전생이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