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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옌데 May 18. 2020

여전히 나홀로 독재 중인 사람들

상식과 교양을 죄인 취급하면서.

  최근에 제인 오스틴의 소설 [설득]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18세기 영국 귀족들의 사랑과 연애, 그리고 허영과 허례허식을 지켜보다 보면 실소가 터져나올 수 밖에 없다.


  가난한 몰락귀족들이 손바닥만한 영지와 허울 뿐인 귀족 작위를 손에 거머쥐려고 열심히 계략을 꾸미는 모습들이 묘사된다. 한편으로는 정도도 파악할 만한 지적 능력과 교양조차 없어도 단지 부유한 집안의 핏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상 대대로 내려받은 재산으로 평생 아무 일도 안 하고도 떵떵거리며 사는 하급 귀족들도 있다. 제인 오스틴은 이런 자들의 삶의 이면을 굉장히 날카롭고도 섬세한 문체로 그려고 있다.


  스스로를 우아하고 고귀하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허영과 무식, 위선으로 가득 찬 영국 귀족들의 유치한 사랑놀음과 얄팍한 재산 싸움을 보고 있 문득 21세기의 한국에 살고 있는 소위 기득권층이라는 사람들의 행태가 겹쳐 보인다.




  대국에서 기득권층을 정의하는 기준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지표들이 있겠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 금융소득과 임대소득이 전체 수익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가 등등, 오로지 '재' 하나로 기득권지 아닌지를 구분하곤 하는데, 슬프게도 이런 분류법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 편이다.


  제인 오스틴이 살던 이백 년 전의 영국에서도,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명확했던 조선에서, 많은 재산이 없어도 그저 핏줄 하나로 당당히 양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지만, 대한민국에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한 뒤로는 가문의 명성보다도 개인의 인맥(혈연, 지연, 학연)이 더 중요해졌으며, 그 인맥은 오로지 재력과 권력이 많은 사람과 얼마나 친하냐유치함 다.


  본인이 스스로 기득권층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 중에는, 간혹 본인이 궁지에 몰리는 경우에 "니들 내가 누군 줄 알아?" 라거나, "내 전화 한 통이면 니들 다 모가지야!"라고 호통을 치는 부류가 있는데, 사실 그건 서슬 퍼랬던 7~80년대 독재 시절에는 정말이지 굉장한 무기였다.


  실제로  고위부처 에 친인척이 있거나, 권력자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재력과 인맥을 가진 사람들 또는 그들의 '지인들'의 말 한 마디면, 아무리 불합리한 요청도 대부분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곤 했다.


  불법을 저지른 자들이 죗값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법과 원칙과 양심을 제대로 따른 사람들이 불이익을  부조리한 세상을 접한 어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적당히 엎드리고 적당히 타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잘못 가르쳤다.


  1993년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공식적으로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에도, 이미 그런 에서 수십 년간 살아왔던 장년층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독재정부가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상식과 교양의 부재'라는 이름의 독재이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민주화 그먼 나라 일일 뿐이다. 그 당시에 여성은 결혼 전에는 무조건 "미스ㅇ"라는 호칭으로 불리면서 남자들이 하기에 소위 '뽄새'가 안 나는 잡일을 군말 없이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고, 결혼 후에는 "ㅇㅇ엄마", "ㅇㅇ댁" 등으로 불리며 독립된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되는 걸 사회로부터 거부당했다.


  2020년대에도 여성에 대해 이 정도 수준의 인식을 가진 자들은, 여성 인권 측면에서는 군부독재 시절보다도 한참 이전인 조선 말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현대인의 상식과 교양은 이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천박하기 이를데 없는 황금만능주의의 표상이다.


   말 한마디면 이유 불문하고 모두가 내 앞에 무릎 꿇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보다 더 생명력이 끈질긴 독재자가 웅크리고 앉아서, 자신의 시대가 일찌감치 지나갔음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다.


  진정한 민주화는 정치 민주화, 경제 민주화로도 충분치 않다. 90년대 이전의 군부독재 시절을 겪어온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앉 독재자를 스스로 몰아내는 문화 민주화, 인식 민주화야말로 진정한 독재 청산의 결이다.


  무식이라는 이름의 독재자에게 사로잡혀 있는 줄조차도 모르고 잘났다고 나대는 졸부 기득권층과 자칭 지식인들의 행태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동종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뿐, 자기 객관화와 자아 성찰, 사회현상에 대한 고찰은 완강하게 거부한다. 더 나은 삶의 가치관 확립과 실천보다는 오로지 자산 증식에만 몰두하는 기득권층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의 길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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