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옌데 May 04. 2020

기본권과 학사모의 상관관계

수년 전에 썼던 글이지만,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에.

  대한민국은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좋은 인프라를 가진 나라이지만, 노동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기에는 최악의 나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대학교존재하는 목적은, 고등학교 무상교육 과정을 마치고도 더 깊이 있는 공부에 뜻이 있어서 타직업군에 비하여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요구하는 법조, 의료, 과학 등과 같은 전문직종에 종사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한, 정규 교육 과정이 아닌 일종의 전문직 양성소였었다. 대학이 마치 정규 교육과정처럼 취급되는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들지만, 정말 전문직 양성소였던 적이 한때나마 있었다.


  전문이 되려면 고학력이 요구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의대를 나오지 않은 의사가 없듯이)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필수지만, 다른 일반직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원래 학사 또는 석박사 학위가 딱히 필요치 않았다. 사실 지금도 자기 전공을 살려 취직한 사람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고속 경제성장을 손수 이루어낸 부모세대들의 대졸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봐도, 경제 성장 및 사회 선진화에는 그렇게 많은 수의 고학력자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그 세대들이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 부모님들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했던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학교 졸업장을 들고 학사모를 쓴 자녀와 사진을 찍는 것이 부모로서의 최고의 영광이자 (남들에게 은근히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표라는 이상한 사회통념이 생겨난 후로, 너도나도 자식을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를 쓰고 악착같이 공부를 시켜대는 교육열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열기에 힘입어 사교육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져갔는데, 이는 순전히 대졸자의 수가 그 당시엔 매우 적었었고, 학사 학위만 취득하고 나면 취업시장에서 원하는 직장을 골라서 갈 수 있을 정도의 특권이 보장되는 시기였었기에 가능했었다.


  어떻게든 대학만 보내 놓으면 제 밥값은 무난히 벌어먹고 부모의 노후도 해결해줄 거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건 90년대 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런 생각을 한두 명만 하고 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간과했고, 그 부작용이 금방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학 입학 지원자가 갑자기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자, 전국에서 돈 좀 있다 하는 부자들이 투기와 절세를 목적으로 앞다투어 사학재단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각종 대학과 전문대학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급기야는 대학 정원이 수험생 숫자보다 더 많아지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매년 쏟아지는 대졸자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대학 졸업생들이 취업시장에서 큰 메리트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제 전국의 학부모들의 목표는 평범한 대학 입학만이 아닌 수도권(인서울) 대학 입학으로, 그리고 다시 수도권 안에서도 명문대 입학으로 계속해서 상향 조정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로 대표되는 대학 서열이 생겨났고, 명문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취업 시장에서 받는 불이익이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눈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대기업의 오너들이었다. 흔치 않은 고학력 대졸자들을 서로 자기 회사로 모셔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사들과 스카우트 전쟁을 벌였던 시절은 이미 먼 옛날이 되었고, 이제는 넘쳐나는 취업준비생들의 이력서와 자소서를 전부 한 번씩 제대로 읽어보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고학력 구직자가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게 다.


  그러므로 회사가 직원과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완전히 바다. 창사 초창기에는 직원들이 회사의 부를 창출해내는 인재이자 동반자라고 생각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신중히 뽑고 가르치고 키웠다고 자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마음껏 쉽게 뽑아서 쓰다가도 조금이라도 회사에 부담이 되면 금방 다른 사람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변해버다.


  이는 산업화 초기부터 노동자의 인권이나 기본권보다는 산업 개발과 경제 성장만 우선시했던 유신독재 및 군사정권의 영향 절대적이다. 청년 전태일이 그 피 끓는 심정을 꾹꾹 눌러 담아 대통령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박정희는 살아생전에 한번 읽어보기나 했을까. 이 땅에서 수많은 전태일들이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희생되고 착취되다가 스러져갔고, 살아남은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은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의 노인빈곤율(40%)이다.




  이제는 대학 졸업 자체로는 취업에 딱히 유리하지도 않은데도, 그나마 학사 학위조차도 없으면 아예 이력서를 넣지도 못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자녀들을 명문대로 보내려는 부모들의 열망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매년 더 큰 경쟁을 가열시키고 있다.


  이는 마치 영화관에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영화를 보려고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일어선 채로 영화를 보는 게 다리 아프고 불편하다 해도, 앞자리의 사람도 서 있기 때문에 영화를 제대로 편하게 감상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나 혼자만 편하게 앉아있으면 조금이라도 영화를 볼 수 있을 가능성조차 없어진다. 그래서 모두가 불편하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서있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함께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타협과 인식의 개선이다.


  그런데 여기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여전히 간과하는 것이 있다. 자녀를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보내려는 근본적인 이유다. 가정과 개인의 행복 추구가 아니라, 내 자식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나와야 남들에게 꿀리지 않고 신나게 침 튀기며 자랑할 수 있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춘 나머지,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는가,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가, 인격이 얼마나 훌륭한가가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즉, 재산이 얼마인가)가 자녀와 자신의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어리석게도 여기에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를 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이 모든 사달이 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 말로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아라, 양심과 도덕률을 지켜라,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가르쳤겠지만, 우리가 사회에 진출해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거라고는 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남을 밟고 올라서서 경쟁에서 이겨라, 들키지 않을 사소한 죄는 적당히 저질러도 괜찮다, 아무리 잘못된 거라도 남들이 다 할 때 너만 안 하는 건 바보짓이다 따위의 나쁜 가르침이다.


  만일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연봉이 얼마이며 차가 몇 대 있고 집이 몇 평이냐'는 것 따위보다도, '얼마나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정직하게 사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이 모든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으련만.


  물론 그렇게 되려면 먼저 직업의 차별이 없어야 되며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복지와 문화적 인식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일찍이 부의 재분배나 사회적 책임 같은 의무는 진작에 갖다 버리고 이윤 극대화에 눈이 뒤집힌 대기업들은 납품업체들의 단가 후려치기 분야에 있어서 프로페셔널이 되었는데, 이는 말로만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시는 공정거래위원회 및 금융원이 오랫동안 이를 제때 제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마진이 크게 줄어든 중소기업들은 직원 연봉을 넉넉히 지급할 형편이 되지 못하게 되고, 그러자 모든 취업희망자들이 고소득을 보장하는 대기업에 목고 있다.


  험난한 경쟁을 뚫고 취업해봤자 밤낮없이 죽도록 일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그들의 삶과 영혼과 가정을 알량한 연봉 몇 천만 원과 맞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모두가 그것마저 부러워하는 끔찍한 사회가 형성되고 말았다.


  노동자가 각자의 필요나 가치관에 따라 추가 성과를 얻기 위해 야근을 할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박봉과 저복지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대기업을 선망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재벌들은 중소기업을 쥐어짜 얻은 수익으로 문어발식으로 업종을 확장하여 이제는 골목상권까지도 무분별하게 위협하고 있고, 영세한 자영업자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밥벌이 수단을 잃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기업들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이 창업 경쟁에 계속해서 뛰어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와중에 대졸자 수는 매년 넘쳐나서, 이제는 각종 석사, 박사 학위마저도 더 이상 전문직 종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원래의 취지였던 학문에 뜻을 둔 지식인이나 학자, 또는 학위가 꼭 필요한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라 해도 단순히 취업을 위해 고학력 스펙용 도구로 석박사 학위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회적 낭비인가!




  왜 이렇게 쓸데없고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물론 상대적으로 좁은 국토에 천연자원도 부족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데다 지나치게 높은 인구밀도를 가진 대한민국이 겪어야 할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이비정상적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몰래 이런 상황을 이용하고 즐기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수시장의 침체를 걱정한다는 경영인들이 정작 자신의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연봉을 올려줄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오히려 임원들만의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거나, 어린 학생들의 복지와 무료급식, 학부모들의 육아휴직 확대에는 결사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론 낮은 출산율을 걱정하는 등의 이중적인 면을 보이는 무책임한 사람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육과 복지제도가 잘 조성되어있고 사회 불평등이 비교적 적어서 자주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는 북유럽의 선진국들은 대학 진학률이 오히려 우리보다 낮다. 그리고 본인의 적성에 맞는 전문 직업학교로 진학하여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 고학력 전문직에 못지않은 적절한 소득과 사회적 대우, 그리고 충분한 복지 혜택이 보장된다.


  우리나라나 미국처럼 학력의 차이가 큰 연봉 차이를 만들어 상대적 박탈감에 젖게 만들지도 않고, 또 전문직이 일반 직종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허용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 정서가 그러한 시민의식의 기본 바탕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자신보다 경제적, 사회적 수준이 낮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무시하고, 또 그것을 사회적으로 통용하거나 억지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부분부터 먼저 확실히 고쳐나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지인들 중에서 무척 진보적인 마인드를 가진 분조차도, 환경미화원이나 청소부들은 학력이 낮아도 몸만 건강하면 쉽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연봉이 높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세상의 모든 합법적인 직업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고귀한 노동의 집약이며, 그 어떤 직업군이라도 성실히 풀타임으로 근로하는 이상, 저소득을 당연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동에 대한 임금은 단순히 그 업무수행을 위해 얼마나 많은 학력이 필요한가, 또는 얼마나 그 직업을 갖기가 어려운가에 초점을 맞출게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없을 때에 얼마나 큰 문제가 생기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인가에 따라 전문직에 준하는 적절한 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인 예시로, 우리나라의 모든 성형외과 의사들 또는 전국의 환경미화원들 중 어느 한 집단이 갑자기 한국에서 사라다고 가정했을 때, 어느  사라지는 게 우리 사회에 더 큰 영향을 치겠는가? 물론 성형외과가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므로 오해하진 말길 바란다. 다만 성형외과 의사의 수억 원대 연봉과, 사무실 빌딩 또는 지하철 역사 내의 청소부가 받는 최저임금 액수 차이가, 이 사회 내에서 그들고 있 중요성과는 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 잘못된 제도로 인한 것들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개념과 인식의 부재로 인해 야기된 것들이다. 사회제도를 형성하고 수정하는 것도 결국 사람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가 자녀들에게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들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 상관없다"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존중받기에 충분한 인격체들이며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다 같이 공존하는 방법을 먼저 제대로 가르쳐주었더라면, 또 어른들부터 그것을 잘 실천하며 살아왔었더라면, 지금 우리 사회가 배출하고 있는 스트레스의 최소한 절반 이상은 스스로 해소되지 않았을까.




  최근 수 년 간 기본소득제 도입과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 시국에 우리는 장기적으로 볼 때 무엇이 공정하고 올바른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 사회에 더 이득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제대로 깊게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사유과 고찰, 그리고 연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에게 주어진 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