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사람들은 두려움에 맞서서 이겨내는걸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왜 두려움을 적극적으로 피하면 안 되는 걸까?
어떤 두려움의 대상을 감지할 때, 우리의 말초신경은 뇌가 감지하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즉각 피하라는 신호를 근육으로 보낸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두려움은 본능적으로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작 죽음이 왜 두려운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하지도 않은데도, 우리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를 가장 심각한 위험으로 간주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죽음이 바로 내 눈앞까지 바짝 다가왔던 그 순간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나는 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혼자서 계산대를 지키던 중이었다. 유독 일진이 나빴던 그날, 가게를 찾아온 두 명의 손님들은 신용카드 대신 커다란 회칼을 내밀면서 가진 돈을 전부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제 남은 내 삶은 이름 모를 강도의 즉흥적인 행동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비극으로 얼룩질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그 자리에서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는 먼저 내게 티셔츠를 벗으라고 명령하고 그걸로 내 두 손을 등 뒤로 묶었다. 그리고 노끈으로 눈을 가린 다음 배를 바닥에 붙이고 엎드리게 했다. 미칠 듯이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내 심장소리가 기차소리만큼 크게 들렸고, 온몸의 신경은 지나치게 또렷해졌다.
아옌데 스케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칼날이 나의 등이나 옆구리, 팔뚝, 아니면 뒤통수 어디라도 쑤시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두려움은일평생 겪어본 적이 없었다.
운 좋게도, 나는 그날 칼에 찔리지 않았다. 다행히 강도들은 돈이 될 만한 것들만 챙겨서 그대로 달아났다. 나는 그 후유증으로 일주일간 집 밖으로 외출을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상파울루에서 살면서 강도를 네 차례나 더 당했지만, 천운으로 한 번도 다치지 않고 사지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와서 거칠게 악수를 청하던 죽음의 두려움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강도를 만나는 게 반복될 때마다 불안은 점점 더 심해졌고, 급기야 길 위의 모든 행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의심하는 신경증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내가 쉽게 브라질을 떠나지 못했던 건 어릴 때부터 학습받은 가치관 때문이었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잘 극복하고 끝내 성공하는 게 이민자의 덕목이라는 생각이 깊게 박혀있었고, 어디선가 들었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격언을 마치 진리인 양 맹신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성공한 삶을 쟁취한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 한 번의 칼질, 한 방의 총알에 목숨을 잃는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결단을 내리는데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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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지낸 제2의 고향 브라질을 나 홀로 떠나기로 했고,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나의 고국으로 다시 한번 이민을 오게 되었다.
두려움에 얽매인 삶은 가치관을 파괴하고 재정립하지만, 모든 파괴가 삶에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상파울루에 남아있는 가족들과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온 나는 지금 한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다. 이겨내지도 못할 두려움에 계속 맞서기를 택했었다면 과연 어떤 결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을게 확실하다.
위기가 닥쳐올 때 무조건 맞서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인생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유동성을 혼자서 설정해놓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을 필요는 없다. 비록 죽음은 의지만으로 회피할 수 없지만, 그 밖의 두려움은 웬만하면 거의 다 피해 갈 수가 있다.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은 수치도, 망신도, 어리석음도 아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자.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을지 어떨지는 일단 도망쳐 나와봐야 안다.
FEARLESS는 격월로 발간되며, 연남동과 성산동, 합정동 등 홍대 부근의 일부 서점 및 북카페에서 무료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