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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옌데 Oct 04. 2022

나르시시스트의 불안

격월지 FEARLESS 2호 - 여러분의 불안에 대해 들려주시겠어요?

  불안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나온다는 걸 요즘처럼 처절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내 불안의 요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직접 확인한 직후라서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최근까지도 나는 여자친구와의 대화가 제일 두려웠었다. 놀랍게도 우리는 지금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신부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모든 건 나 자신이 자기애성 인격장애, 즉 나르시시즘 성향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른여덟 평생 나 자신이 나르시시스트였다는 걸 전혀 몰랐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도 지난 1년 동안 여자친구와 부단하게 투닥거렸던 트러블의 원인이 나였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나 자신이 바라보았던 나라는 사람은, 뭐랄까, 둥글둥글하고 모난데 없는 성격에 남들과 척지는걸 최대한 회피하는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했었다. 나랑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면 그와 마찰을 빚기 전에 내가 먼저 스윽 몇 걸음 물러서서 거리를 두기를 택했다. 그래서인지 평생 주변 사람들과 크게 다퉈본 적도 없었고, 나 때문에 기분이 상한 사람을 달래본 경험도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나는 내 성격에 문제가 별로 없다고 아주 굳게 믿고 있었던 거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나는 종종 여자친구와 크게 다퉜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밀도 높은 연애를 해본 게 처음이라, 연애라는 게 그저 원래 이렇게 다투면서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말다툼이 점점 더 잦아지고 두 사람 모두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척 고갈되었을 때, 여자친구가 커플 심리상담을 한번 받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우리가 겪은 트러블의 원인이 대부분 여자친구일거라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심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심리상담에서 자기애성 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나는 거의 망치로 머리를 후드려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상담사 선생님의 비유에 따르면 나는 나 자신이 마치 새하얀 칠판처럼 완벽하게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신화를 계속 유지해야 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거기에 손톱만 한 흠집이라도 낼 것 같을 때면 내가 평소와 다르게 엄청나게 공격적으로 대응한다는 게, 지난 1년간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여자친구의 생생한 증언이었다. 사실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닫고 받아들인 건 전적으로 여자친구 덕분이다. 나는 나에게 불리한 정황이 생길 때마다 스스럼없이 나나 상대방이 했던 발언을 왜곡하거나 뻔한 거짓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았었다. 뛰어난 기억력을 이용해서 그 사실을 여러 차례 증명해준 게 바로 여자친구였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증언하건대, 내가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를 속일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한 게 아니었다. 무의식 속의 나 자신이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속인다고 말하면 너무 이기적인 표현일까? 그런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나는 나 스스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결점 투성이의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인격은 항상 흠 없는 순백으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말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기제가 발동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도 내가 저지른 잘못을 도무지 회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면, 나는 끝없이 자책을 반복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내가 자책 모드에 한번 들어가 버리면 혼자서 빠져나오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완벽해야 하는 나의 인격에 생채기가 났다는 사실이 너무 실망스럽고 속상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쓰레기로 몰아가거나, 또는 그 문제를 지적한 사람을 공격해서 어떻게든 내 잘못으로부터 화살을 비껴가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여자친구는 이미 나 때문에 기분이 상한 상황에서도 자책 모드로 들어간 나를 오히려 위로해줘야 되거나, 또는 내 문제를 굳이 지적해서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되어서 나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어떤 상황이었든 간에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던 건 여자친구가 이 문제를 전문가에게 가져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현명했고, 또한 나와 내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해주었으며, 게다가 내가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고 고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말로 크나큰 복을 받았다고 자랑할 수 있다.


  결국 내가 여자친구와의 대화를 두려워했었던 건 혹여나 내가 똑같은 잘못을 또다시 저지를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타인이 나를 괴롭힐까 봐 불안해하는 것보다, 내가 타인을 괴롭히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는 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의외로 해결책은 아주 간단했다.


  여자친구는 내가 조금 흠이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느냐고. 사람이라면 응당 살아가면서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사과도 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라고. 그래서 혹여 가끔 말실수를 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상대방의 심정을 먼저 헤아리고 사과하면 해결될 가벼운 문제인데, 나는 오로지 내 실수에만 집중하고 자책하느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다 보니 작은 실수로도 상대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했다.


  나르시시스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 자신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명백하게 잘못을 한 상황에서도 자기의 흠집만 감추려 들고, 정작 자신이 피해를 끼친 대상에는 관심 두지 않는다는 게 바로 나르시시스트들의 인간관계 형성에 가장 치명적인 결점이다. 나는 그런 점부터 고쳐나가기로 했다.


  평생 갖고 있던 사고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제대로 가진 이상, 예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바뀌어야 한다. 동네 도서관에 가보니 생각보다 꽤 도움이 되는 책들도 많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크레이그 맬킨의 '나르시시스트 다시 생각하기'를 읽고 좋은 정보를 많이 얻었다.)


  자신의 문제점을 제대로 깨닫는 것 자체가 나르시시스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전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심리상담소에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또 상담을 한 두 번 받은 걸로 근본적으로 바뀌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평생 지켜온 자신의 완벽함을 쉽사리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심각한 성격장애가 있음을 제대로 깨닫고 고쳐나가기로 마음먹은 건, 심각한 수준의 악성 나르시시스트가 아니었어서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떤 나르시시스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물론 주변인들의 도움과 기다림 또한 중요하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자들은 스스로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름 평생 애쓰는 인간들이다. 단지 그 노력의 방향과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것만 깨닫게 해준다면, 자신만의 기준이 아닌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정말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지긋지긋했던 불안은 어떻게 되었냐고? 내가 힘겹게 얻는 데 성공한 이 문제의식을 평생 마음속에 소중하게 간직하는 한, 똑같은 문제가 나를 다시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한다.




FEARLESS는 격월로 발간되며, 연남동과 성산동, 합정동 등 홍대 부근의 일부 서점 및 북카페에서 무료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배포처: 책방 서로, 아침달, 스프링플레어, 무슨서점, 독서관, 아인서점, 색소음, 도깨비 커피집, 서울청년센터 마포오랑, 공동체라디오 마포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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