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우리는 언제나 이직 중이다.

줌을 떠나며

by 라인하트

한국은 1997년 IMF 이후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기업은 변화하는 경영 환경 적응하기 위해 직원을 해고하고, 직장인들은 연봉 상승이나 경력 개발을 위해 이직합니다. 직장인들은 여러 번 이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한 직장에 오래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기업은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는 신입사원 보다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 사원을 채용하였습니다. 이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상관없이 이직은 직장생활의 일부분입니다.


직장인의 입장에서 이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퇴사를 결정하는 자발적 이직과 회사가 직원을 퇴사시키는 비자발적 권고사직입니다. 두 이직은 모두 회사를 떠나는 행동은 동일하지만, 당사자의 감정 흐름은 너무나 다릅니다. 자발적 이직은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큰 기대감이 자리잡지만, 비자발적 권고사직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압도적으로 큰 충격입니다. 이유는 퇴사 결정이 당사자가 아니라 외부의 회사라는 것과 사전에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던 상관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직장인은 누구나 퇴사라는 문 앞에 서 있습니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갈지와 남이 열어주는 문을 나갈 지의 차이입니다. 직장인들은 퇴사라는 문이 영원히 닫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기업의 비즈니스 환경이 변하면 퇴사의 문은 언제나 열립니다. 결국, 직장인은 언제나 퇴사라는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가슴에 사직서를 품거나 즐겁게 일하거나 상관없이. 누구나 떠날 준비를 말하지만, 준비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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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퇴사라는 문 앞에 서 있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지금까지 4번의 이직을 하였습니다. 2000년 7월 데이터크래프트 (현 NTT)에 네트워크 엔지니어로 입사하였고, 2008년 1월 연봉상승을 위해 폴리 (Poly)로, 2008년 7월 경력 관리를 위해 시스코로, 2021년 11월 나 자신을 믿기에 줌 (Zoom)으로 이직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줌에서 퇴직을 합니다. 지금까지 3번의 자발적 이직을 하였고, 줌에서 1번의 권고사직을 당하였습니다.


자발적 이직은 새로운 환경에 도전을 하고 적응하는 설렘과 기대가 컸습니다. 이직할 때마다 필자는 언제나 마음속에 되뇌는 구절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행동이다. 선택은 올바르거나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순간은 선택 후 오랜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직할지 말 지를 고민할 시간에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할지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행동이다


권고사직을 통보받은 후 지난 한 달간 생각이 많았습니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큰 이직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퇴직은 주위 동료들도 적잖이 놀랐습니다. 줌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였고, 필자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였고, 음모론이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반응은 시간이 지나면 다 정리될 것입니다. 또한, "줌은 왜 구조 조정을 할까"와 "왜 나일까"라는 생각이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줌 코리아의 매출 감소와 엔지니어 조직 변경으로 직원 해고는 불가피합니다. 줌 코리아의 엔지니어는 필자가 추천한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그만두어야 한다면, 필자가 제일 먼저 그만두어야 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말하지 못한 진실도 드러날 것입니다. 쓸데없는 고민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퇴사와 이직은 병가지상사일 뿐입니다. 두려움이 큰 비자발적 권고사직을 당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이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자발적 이직을 하는 것도 우습습니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 성장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변화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 시작되기도 합니다. 시스코를 떠나면서 가장 후회되었던 것은 14년간 이 직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 것이었습니다. 시스코에서 매니저로 승진을 한 것도 연봉이 크게 증가한 것도 아니면서 현실과 타협하였습니다. 아마도 지금 즈음 줌을 그만둘 수 있는 적정한 시기일 지도 모릅니다. 단지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얼마 전 짐(Gym)에서 달리기를 하면서 토털리콜(Total Recall,1990년작)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필자의 마음을 울리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Kuato:“What is it you want, Mr. Quaid?”
Quaid:“I want my memory back.”
Kuato:“But you are what you do. A man is defined by his actions, not his memory.”

쿠아토 : 무엇을 원하시오, 퀘이드 씨?
퀘이드 :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쿠아토 : 하지만 당신이 하는 행동이 당신이요. 사람은 행동으로 정의되지 기억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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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토털리콜 (Total Recall)의 대사는 2017년 고스트 인 더쉘 (Ghost in the shell)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기억인 것처럼 기억에 집착하지만,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이다

We cling to memories as if they define us.
But what we do defines us.

두 영화의 대사는 모두 정체성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다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필자가 몇 번을 이직하더라도 "IT 엔지니어"라는 필자의 정체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줌에서 보낸 지난 4년에 대한 필자의 기억보다 4년 동안 보여준 필자의 행동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필자는 줌에서도 시스코와 마찬가지로 동료들로부터 퇴사 선물을 받았습니다. 필자가 보여준 행동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합니다. 그들과 많은 것을 함께 하였고, 그들과 많은 것을 함께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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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7일은 줌에서 일하는 필자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Today is my last day.."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 하지만, 이미 인트라넷 접속이 끊겨 보낼 수가 없습니다. 다음 글로 대신합니다.


시스코를 퇴사하면서 동료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에서 윌리엄 A. 쉐드 (William G.T. Shedd)의 말을 인용하였듯이 오늘도 인용합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존재의 이유는 아니다
A ship is safe in harbor, but that's not what ships are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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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항구에서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고,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것이 길을 떠날 좋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다는 아직 어둡고 도착할 항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차피 떠나야 할 항구라면, 지금이라도 좋습니다.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된 항해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항해의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큰 힘은 필자와 함께 하는 IT 업계의 동료들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단단한 버팀목과 돛대가 되어주고,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동료들입니다. 엔지니어라는 정체성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필자의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다음 도달할 항구에서 엔지니어로 만나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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