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30분 취미 그리기의 기적

그리기의 목적은 그리기다

by lineteller

2018년 봄이다. 지인을 따라 독서 모임에 갔다가 드로잉 클래스만 듣고 왔다. 드로잉 선생님은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스케치북에 슥슥 선을 그리고 스륵스륵 색을 칠하더니 금세 작품을 완성했다. 선생님은 '작품이 멋져요'하면 쑥스러워하셨겠지만 내 눈에는 정말 그랬다. 신기하고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재능이 부러웠다. 단 한 번도 시도하거나 도전한 적 없는 그리기라는 세계가 내게는 까마득히 먼 나라 사람 얘기 같았다.


한 달쯤 후였을까, 독서 모임 멤버 한 명이 독서모임을 제안했다.

'원래 있던 모임 아닌가?'싶었는데 다른 점이 있었다. 자신이 읽은 책 내용이나 떠오르는 장면을 작은 엽서 한 장에 그려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는 거였다. 해 본 적 없지만 재밌어 보였다. 그림을 잘 그릴 자신은 없었지만 글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마음이 끌렸다.

그림이 있는 독서 모임

'그림이 있는 독서모임'을 제안한 지인에게서 소소한 선물도 받았다. 겉면에 드로잉 용이라 적힌 B5사이즈 스케치북 한 권과 피그먼트 라이너 0.3mm 한 자루. 사실 고맙게 받으면서도 '내가 이걸 쓸 일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미술이니 그림 같은 건 열 살 무렵에 두 달 정도 다닌 미술학원이 마지막 배움이었고, 누구에게도 잘 그린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재능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림이 있는 독서모임'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 반년 동안 많은 게 변했다.

선물 받은 스케치북과 피그먼트 라이너

가장 큰 변화는 어디 가든 스케치북과 펜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늘 두세 권씩 들고 다니던 책에서 한 권을 빼고 스케치북을 넣었다. 책 읽는 시간을 조금 줄이더라도 2, 30분씩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휴대폰 속 장면을 스케치북에 옮겨 그리는 시간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똑같이 그릴 수 없다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내게도 생긴 나날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있는 걸 잘 못 그리는 사람이란 것도 알았다. 대신 건물은 똑같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편안하게 그렸다. 선도 쭉쭉 한 번에 긋고 크기나 구도가 안 맞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잘 그렸거나 말았거나 완성하는데 의미를 뒀다. 음영을 넣거나 색을 칠할 욕심은 내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 둘 그림을 그리면서 보이는 내가 있었다. 37년 동안 모르고 살았던 나. 안 보이던 내 모습이 선으로 건물을 표현하면서 드러났다. 나는 드로잉이 좋았다.


2019년 한 해는 드로잉에 푹 빠져서 살았다.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쓰고 두 권째도 거의 채웠다. 2020년에는 조금 줄었지만 대신 더 큰 드로잉에 도전했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 금세 갔다. 코로나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드로잉도 많아졌다. 지금 돌아봐도 신기한 건 드로잉을 시작한 후 삶을 대하는 태도에 생겨난 여유다.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던 성격이 늘어진 선처럼 느슨해졌다. 실수를 허용하고 용서하는 일이 쉬워졌다. 조급함에 쫓기기보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뭐'하고 태평하게 굴기도 했다. 도대체 드로잉은 내게 무슨 짓을, 기적을 일으킨 걸까. 나는 다만 그리고 싶은 장면을 그릴 수 있을 때 그려낼 수 있는 만큼 그렸을 뿐인데 말이다.

보아뱀.jpg 보아뱀 그림 흉내

그림을 생각할 때마다 『어린 왕자』첫 장면이 떠오른다. 코끼리를 삼킴 보아뱀을 그려서 '무섭지 않아요?'하고 물었다가 모자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냐면서 '쓸데없는 모자 그림이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은 건 집어치워'하고 말했던 어른들. 덕분에 그림을 그만둬서 어린 왕자에게 건강한 양을 그려주지 못하게 된 비행사 아저씨처럼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나는 뭘 그리고 싶었던가. 어떤 걸 그려왔고 앞으로 뭘 그리게 될까. 할 말도 많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적지 않지만 다른 말에 앞서 이렇게 말하고 시작해야겠다.

"하루 30분, 그리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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