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그리기보다 끝까지 그리기

세상에 완벽한 취미는 없다

by lineteller
덕수궁돌담1.jpg 어디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내 드로잉은 근본이 없다.

나도 알고 주변 친구들도 다 안다. '근본이 없어서 좋은 게 있느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있다'라고 할 수 있다. 근본이 없는 만큼 규칙이니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만큼 자유롭다. 다시 누군가는 '그럼 엉망진창으로 그려도 괜찮다는 거냐'할지도 모르겠는데, 괜찮다기보다 엉망진창으로 그렸어도 어쩔 수가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다시 그리거나(물론 그리기를 마치고) 다른 걸 그리기 시작하면 그만이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처음에는 잘 못 그리는 내 손과 솜씨가 애석했다. 어째 이게 최선이냐며 스스로에게 연민마저 느꼈다. '이렇게 재능이 없다니' 하면서. 그래도 그만두지 않은 건 처음부터 목표가 작품 완성에 있지 않아서다. 다만 쉴 시간이 필요했고, 멍하니 가만히 있는 건 잘 못하니 뭔가에 몰두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 그리기를 마치는 데 의미를 뒀다. "이게 도대체 어디야?" 하며 놀리듯 말하는 친구에게도 태연하게 사실을 밝혔다.

대미지 없음. 충격받지 않는 내가 좋았다. 그리는 동안 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게 좋았다. 내게 드로잉은 명상이었다. 그려나가는 선은 보이지 않던 길이었다. 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닿았는데 '여기가 시작이구나'하면 그걸로 시작이 됐다. 그게 좋았다. 길을 잃지 않는 방법, 목적지 없음이랄까.


서울 시청 광장을 지나 대한문을 끼고 뒤로 돌아가면 길게 이어진 담장과 마주치게 된다. 그려둔 걸 보니 겨울인 모양인데 담장과 난간, 담장 너머로 보이는 앙상한 나목이 함께 있는 풍경이 좋았나 보다. 사진으로 찍어서 제법 욕심을 내서 그렸을 텐데,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던 모양이다. 난간이며, 돌이며, 크기며 온전한 게 없다. 아무렴 어떤가, 여기가 어딘지 확실히 아는 건 나뿐인데 여차할 땐 우기면 그만인걸. 세상에 완벽한 취미가 어디 있는가 이 말이다.


근본은 없지만 드로잉에 규칙은 있다. 첫 번째는 중도포기하지 않기다. 엉망이거나 시작을 망쳤어도 마지막 선 하나까지 그리고 나면 무언가는 그릴 수 있다. 드로잉에 쓴 시간이 조금도 헛수고라거나 낭비가 되지 않는다. 모든 선이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들이 마음을 쉬게 했을 테니까. 두 번째는 무리하지 않기다. 그리기 힘든 건 그리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사람, 동물 그리는 게 너무 어렵다. 물론 꾸준히 연습하면 나아질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쉬고 즐기는 거지 더 향상되고 발전하는 게 아니다. 취미가 직업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 하기. 지치거나 질리지 않고 오래 하고 싶기에. 세 번째는 두려워하지 말기다. 100층짜리 건물도 한 줄, 한 칸에서 시작할 수 있다. 마지막 선까지 그리면 완성. 참 쉽죠?


그리고 싶은 게 참 많다.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공간, 사라질 건물, 이미 사라진 장소,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 드로잉이 좋은 건 그리고 싶은 공간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소재가 고갈되지 않는다. 멀리까지 찾으러 가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온다.

그나저나 덕수궁 돌담길을 누구랑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혼자 걸었거나 기억이 봉인됐거나 둘 중 하나인데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어야지. 완벽한 취미는 없다. 완벽한 기억도 없다. 그래서 좋은 일도 분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