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도 다르지 않다
보통 뭔가를 새로 시작하면 이런 위로를 받는다.
"처음엔 다 그래."
일단 위로인 게 분명하다는 게 안타깝지만 분명 처음엔 그럴 수 있다는 말도 틀리지 않아서 기다려보자는 마음이 된다. 그런데 많은 일들이 그렇듯 새로 시작한 뭔가도 간단히 익숙해지거나 능숙해지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도록 나아짐을 체감하지 못하면 위로인 줄 알았던 그 말이 이렇게 해석되기에 이른다.
"처음엔 다 그래. 나중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걸."
해석이 이 지경에 이르면 보통은 여기서 멈춘다. 그렇게 중도포기한 뭔가가 한둘은 아닌 것이다. 다행히 어떤 계기가 있어서 조금 더 계속하게 되면 해석이 추가된다.
"처음엔 다 그래. 나중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걸.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나아져."
눈에 잘 띄지는 않아도, 체감할 수 있을 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아도 계속하다 보면 나아지는 구석이 분명 생긴다. 어떤 구석이냐고 콕 짚어 물어보면 대답이 궁하긴 해도 왠지 그런 느낌이다. 이런 건 느낌이 중요하니까. 일단 우기고 밀고 나가보자.
'이걸' 그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게 최선인가'부터 시작해서 '도무지 보여줄 수가 없다'까지. 특히 고양이들 사이에 영원히 흑역사로 기억될 인간 하나가 추가될 게 분명했다. 뒷다리는 닭다리 같고 앞다리는 막대기 같다. 눈이며 코, 입, 귀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특히 미안한 건 꼬리다. 차라리 '사고로 꼬리가 잘린 고양이라며 그리지 말걸'하기도 했다. 계속 그려도 괜찮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동물은 그리지 말자'였다.
살아 숨 쉬는 녀석들 선은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선이 보여야 그릴텐데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연습하면 나아지기는 할 테지만 공부하고 연습하기는 싫다. 그냥 지금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손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 좋게 말하면 고집 있고 꼬집어 말하면 게으르다. 그래도 그러려니 해야지 어쩔 수 없다. 동물이 아니어도, 살아있지 않은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런 생각으로 그리다 보니 나아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처음에는 조금 답답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고 만다. 좀 잘 그녀지만 오 오하고, 좀 이상하다 싶으면 어어하면 그만이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취미란 애쓰지 않는데 의미가 있다는 게 내 주장이다.
드로잉에서 발전한다는 건 뭘까. 내 생각에는 구도가 안정적이 되거나 선이 깔끔해지거나 거리감이나 균형이 눈으로 보는 모양에 가까워지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지 싶다. 조금만 배워도 기술적으로 금세 나아지는 영역이 있다는 조언도 종종 듣는다. 내 드로잉을 보며 전공자가 그런 말을 하면 왠지 '좀 배우는 게 어때'하는 권유나 아쉬움으로 들린다. 전혀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별로 아쉽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이 어려워서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그림을 그리려고 들여다본다기보다 다시 보고 오래 보려고 그린다고 할까.
살아있는 게 그리기 어렵다는 말은 정말이다. 고양이에게 몹시 미안해서 다시는 그리지 않기로 약속한 드로잉과 비슷한 시기에 그린 고생대 생물들만 봐도 그렇다. 삼엽충, 암모나이트, 실러캔스 친척(?)은 지금은 화석이나 복원 이미지로 만날 수 있는 녀석들이다. 세상에 없는 걸 그리는 건 왠지 마음이 편하다. 없으니까, 이상해도 아무도 화내지 않으니까 그런가 보다. 같은 논리로 드로잉을 공부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면 나는 존재하는 '뭔가'를 그린 게 아니라 내가 '본 뭔가'를 그린다. 둘은 같은 것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엄연히 다른 게 아닐까.
적당한 거리 두기는 코로나 때가 아니어도 미덕일 수 있다. 원본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드로잉이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닐까. 농담이어도 좋고 궤변이어도 괜찮다. 어떤 일의 결과에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