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정신을 놓자
드로잉에 매긴 번호가 80번을 넘어서던 2019년 11월에 떠올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생각은 대략 이렇다.
"우와, 내가 이런 걸 그려내다니. 100번쯤 되면 장난 아니겠는데?"
당간지주나 고양이에게 미안하다며 몇 번이고 사과한 처음을 생각하면 물론 대단한 발전이 분명했다. 그래서 꿈도 꿔봤다. 이대로 쭈욱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꿈을. 없던 목표가 생겨날 정도였으니 그 꿈은 한낮의 허튼 꿈이나 근거 없는 망상과는 달랐다. 분명 이루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가능한 목표였다. 그렇게 보였다. 의문은 없었다. 계속 그리면 될 일이었으니까.
No. 87 반죽동 247은 다 그리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20분, 30분이면 그리던 그림보다 네 배, 여섯 배가 들었다. 이유는 단순한 데 있었다. 딱 그만큼 큰 그림이었다. A3(297*420) 사이즈. 평소 그리던 B6(128*182) 사이즈보다 큰 만큼 시간이 더 걸린 것이다. 뭔가 콕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큰 그림은 큰 만큼 만족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계속 그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 후로 같은 사이즈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때로는 한 번 해보는 것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는 거였다.
그림을 다 완성한 뒤에야 알게 된 즐거움도 더는 큰 그림을 그리는데 집착하지 않게 만들었다.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맥문동 앞에 세워준 억새 커튼을 그릴 때 리듬감과 몰입감이 가장 충만했다. 두 그루 소나무를 그릴 때는 고민하면서도 망설임 뒤에 생겨나는 솔잎이며 나무껍질에 마음이 흡족해졌다. 만족감은 크기나 완벽에 있지 않았다. 새삼 다른 건 다 잊고 순간에 몰두하는 즐거움이 드로잉이라는 취미의 목적이었음이 떠올랐다.
부분은 전체보다 작거나 사소하지 않았다. 부분은 전체를 위해 그려지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부분이 전체였고, 전체가 부분이었다. 지금 그린 무언가는 나중에 완성될 어떤 그림의 일부이면서 전부였다. 걸작 같은 건 남지 않겠지만 의미 없는 그림 역시 없을 거였다. 선들은 내 시간의 기록이면서 면들은 이야기의 다음 장면이었다. 나는 저들끼리 속삭이고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면서 틈틈이 이야기에 끼어드는 당사자였다. 부분에서도 전체에서도 나는 소외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처음 경험하는 내가 주인공인 세계. 그리는 동안 그 세계에서 정신을 놓고 있어도 좋았다. 깨어나서 기억하지 못해도 아무 상관없었다. 내게 뭔가를 그리는 일은 손을 움직이며 하는 명상이고, 눈을 뜨고 하는 기도였다.
웃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누구였는지 잊었지만 그림을 본 두 명이나 세 명이 '엄청 잘 그렸다'며 나보다 더 흥분한 듯 굴었던 것이다. 그런 칭찬이 분명한 말을 거듭 듣는 동안 내 눈은 둥글었다가 네모졌다가 세모나게 변했다. 만족스러웠던 부분에서 전체로 눈을 돌리고 보니 만족스럽지 않은 구석들이 자꾸 눈에 띄었다.
'여기는 구도가 이상하네'라거나 '여기는 그리다 말았구먼', '아니, 이 문은 왜 이렇게 좁고, 이 나무판은 왜 이렇게 넓어'. 지적이 끝나지 않았다.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부족함들이 누군가 칭찬하는 말에 반발하듯 일어나는 게 이상했다. 좋은 말을 좋은 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 나는 아직 아무것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마터면 나는 모자란 부분들을 채워 넣을 뻔했다. 조금만 더 의욕이 있었다면, 기운이 남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다행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때는 더 그릴 힘이 없었다. 마음도 없었다. 다른 의미로 그냥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쉬었다. 그래서 남았다. 처음 그리기를 마쳤던 그림 그대로.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내가 결과야 어떻든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 역시 결과에 연연하는 보통 사람 중 하나였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작은 만족으로 돌아왔다. 부분으로, 전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전체로. 20분이나 30분이면 충분한 처음으로 말이다.
오히려 나다웠다. 대작은 꿈에서 그리는 걸로 충분했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탓에 오래 걸릴지라도, 언젠가는.
그런 게 꿈이다.
현실 속 드로잉은, 그림은 꿈이 아니었다. 작고 사소하고 서투르고 머뭇거리고 후회하지만 기뻐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나와 같았다.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