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를 그리는 나날
첫 드로잉은 책 모임 시간에 그렸다. 책을 읽고 모여서 자기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잘 그렸을 리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드로잉의 주인공을 향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일뿐. 그나마도 형상이 갖춰지면 고마웠다. 같은 걸 보고 그려도 다른 게 그려지는 신기한 일이 항상 일어났다. 마법이 없어도 마법 같은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이다.
하늘과 숲과 들을 그린다는 게 그만 실패로 돌아간 탓에 그날 책 모임에 들고 온 에드거 앨런 포 『우울과 몽상』에 실린 단편 「검은 고양이 」를 그렸다. 그림자에 얼굴 한쪽이 가려진 고양이를 그린다는 게 그만 외눈박이 고양이를 그리고 말았던 것이다. 성공이 없는 페이지.
그래도 잘 참아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매일, 어쩌면 더 자주 일어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외눈박이 고양이 이후 한 달을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모임 시간. 이번에는 비만 범고래가 육중한 몸을 바다 위로 띄워 올리는 장면을 그리고야 말았다. 얼굴은 작은데 아랫배가 불룩한 범고래를 상상하면 된다. 이쯤에서 동물을 그리는 걸 완전히 포기했어야 했는데 어째서였는지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탓에 당간지주 옆 고양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배움이 늦어서 세상의 생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을지 모른다는 지점에 심심한 사과를 보낸다. https://brunch.co.kr/@lineteller/4
무엇을 감추리오. 넉넉한 아랫배와 펑퍼짐한 등, 믿을 수 없겠지만 범고래 사진을 보고 그린 게 맞다. 상어를 닮은 날렵한 등지느러미가 포인트다. 이때는 몰랐지만 범고래는 사냥할 때 물 위로 뛰어오르는 일이 많다고 한다. 물범 같은 녀석들을 물 위로 띄웠다가 떨어지는 순간 낚아챈다는 범고래의 이명은 킬러고래. 그렇게 무서운 녀석인 줄 알았더라면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책을 소개하려고 그렸을 텐데 이 그림을 그리며 소개한 책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문제가 있는 건지, 비만 범고래를 그려놓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지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확인이 어렵다. 다만 기억 저편에 지워진 채로 남아있는 그 책을 애도할 뿐이다. 어쩌면 서가 한 구석에 꽂혀있을 이름을 잊은 소설을.
한낮의 사막을 홀로 비행하는 사진은 생텍쥐 페리 소설 『어린 왕자』를 소개하며 그린 것이다. 현명하게도 사람을 그리지 않은 그날의 나를 칭찬한다. 행성 B612나 바오밥 나무를 그렸어도 괜찮았을 텐데 얼마 후 불시착할 비행기의 위태로움에 마음이 쏠렸던 모양이다. 날고 있지만 곧 떨어질 비행기의 처지에 나를 빗댔던 걸까.
외눈박이 고양이와 비만 범고래와 사막을 나는 비행기 이후에는 한동안 책표지 그리기에 도전했다. 다 그렇지만 표지 그리기 역시 하나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선으로 된 표지를 그려놓고 괜찮았다 싶었는지 다음 책도 책 표지에 사람이 있는 걸 들고 왔는데 로맹 가리 『레이디 L』이다. 표지에는 어딘가 먼 데를 바라보는 로맹 가리가 있다. 이번엔 잘 그렸을까? 아니, 적어도 좀 나아졌을까? 그럴 리가.
결국이랄까 마침내랄까 다행이랄까 그 후로 표지에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는 책은 그리지 않았다. 가끔은 안 되는 건 안 되는 그대로 두는 게 몸에도 마음에도 손에도 누군가의 눈에도 이롭다는 걸 깨닫기까지 반년이 걸렸다는 건 이제는 비밀도 아니다. 내려놓아도 그만두어도 세계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취미라는 말이 어울리는 더 수월하고 성미에 맞는 무언가를 찾고 싶어졌다. 예를 들면, 벽돌 같은 네모나고 무수히 이어져 있는 선으로 가득한 무언가라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