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에 살다가 플로리다로 오기 전 겨울, 하와이에 인연이 닿아서 잠깐 있었다. 겨울이래 봤자 괌에도 하와이에도 겨울 날씨가 따로 있지는 않아 실감이 나진 않았지만.
오아후섬에 있는 친구네 가족 집에서 한달살이 체험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은 온 가족과 같이 생활을 했고, 가끔씩은 혼자 버스를 타고 호놀룰루 곳곳을 돌아다녔다. 리틀 하와이라고 불리는 괌 날씨가 일 년 내내 25-32°C 정도로 따뜻하니까 하와이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한여름 옷들로만 짐을 쌌었다. 그런데 웬걸, 하와이 연중 날씨가 19-30°C인 걸 간과한 데다가 시내버스 에어컨은 또 얼마나 강력하던지.
괌에서는 해가 지고 나면 잘 돌아다니지 않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5-6°C 차이가 엄청 크더라.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감기에 세게 걸린 나는 어느 날 하루 아픈 몸을 이끌고 홀로 나갔다가 와이키키 한복판에서 거의 죽다 살아났다. 여행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아프다고 이불속에만 있는 게 아까워서 이틀 정도를 내리 쉬다가 사흘째 때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간 거였다.
머무는 동안 실컷 타겠다는 집념으로 하와이의 따릉이, 비키(Biki) 자전거 300분 이용권을 호기롭게 구매해서는 브런치로 도넛이랑 커피를 사서 즐기려고 자전거에 올라탄 순간, 감기기운에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이 어지러웠다. 기절할 듯 말 듯 겨우 길 건너편에 있는 스타벅스 화장실로 가서는 구역질을 하다가 곧 쓰러질 것만 같아서 그대로 가만히 앉아 쉬었다.
어지러움이 조금 가라앉은 후에 그 유명하다는 레오나즈 베이커리에 가서 도넛 8개를 포장했다. 다시 스타벅스로 돌아가서 체스넛 프랄린 라떼를 받아 근처 벤치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한 시간가량을 더 쉬고 나니 그제야 좀 괜찮아졌다. 아침 일찍 나온 나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쇼핑몰이 즐비한 와이키키 해변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별 것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걸어 다녔다.
신고 나온 샌들이 예쁘기만 하고 불편한 탓에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발에 물집이 잡혀버렸다. 근처에 있는 신발가게에 가서 가장 저렴한 운동화를 하나 사서 신었다. 신발 사이즈가 230cm (US 5.5) 정도로 작은 편이라 키즈용 신발을 사면 성인용 반 값에 구매할 수 있다. 엉망진창인 몸을 이끌고 좀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저녁시간이 되었다.
입맛이 없어서 아사이볼(Acai bowl: 슈퍼푸드라고 불리는 아사이베리 스무디에 그래놀라와 다양한 과일을 얹어 먹는 하와이 서퍼들의 대표 간식)을 사서 먹었다. 감기에 걸려 죽겠는 와중에도 차가운 디저트는 포기 못하는 나, 아직 젊구나, 생각했다. 칼칼한 목을 어루만지며 24oz짜리 벤티사이즈 스무디 한 그릇을 뚝딱한 나는 기침약, 감기약, 물을 사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네 가족이랑 나눠먹으려고 도넛을 넉넉하게 산 거였는데, 몇 시간을 땡볕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동안 도넛이 다 상해있었다. 들고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집에 도착해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명성만큼 별로 맛있지는 않았어서 아쉽진 않았다. 다만 아침에 과일도 깎아주고 저녁에 요리도 만들어주는 이 친절한 가족에게 나도 작은 성의를 표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조금 속상했달까.
많고 많은 좋은 기억들 중에 역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고생한 기억인가 보다. 사실 괌에서 하와이를 떠올렸을 때는 설레면서도 막상 큰 기대가 없었다. 똑같은 바닷가일 거고, 야자수가 즐비할 거고, 파란 바다랑 하늘이 초록초록한 풀들과 어우러져 예쁠 거니까. 오아후에 처음 도착했을 땐 괌이랑 비슷한 구석만 자꾸 보여서 아무 감흥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오아후섬만 놓고 봐도 오아후는 괌에 비해 인구가 6배 정도 더 많고 크기도 3배 정도 더 크기 때문에 훨씬 활발하고 바쁜 느낌이긴 했다. 발에 치이는 게 쇼핑공간이라는 점, 놀라울 만큼 노숙자가 많았다는 점, 대체로 음식이 맛있었다는 점, 괌에는 없는 스타벅스가 블럭마다 있어서 기뻤다는 점 정도가 생각난다. 월마트를 처음 가보고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다. 버스랑 자전거 대여 서비스도 물론 너무 좋았다.
괌에는 소비세가 없어서 가격표 그대로 계산이 됐다면 하와이에서는 괌에 비해 물가가 아주 조금 저렴한 반면 4.5% 소비세가 따로 붙어서 결국 식당이나 식료품점에서 내는 돈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내외 어딜 가나 반려견과 동행한 사람들이 많아서 굉장히 도그 프렌들리(dog friendly)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덕분에 여행기간 내내 나는 괌에 두고 온 내 멍뭉이가 보고 싶었다.
첫 주에는 자꾸 무의식 중에 괌 풍경과 하와이 풍경을 비교하느라 여행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심하게 아팠던 바람에 심드렁했던 탓도 있지만. 어쨌거나 1주일 내내 한국에 있는 가족들한테 "하와이 별 거 없네. 그냥 뭐 서울 같기도 하고 괌 같기도 하네."라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는 하와이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떠나올 때부터 지금까지도 "나 하와이를 사랑하게 됐어. 나중에 꼭 하와이에서 은퇴할래."라고 말하고 다니게 되었으니까.
유달리 푸른빛이 돌던 바다랑 하늘, 유난히도 생생한 초록빛을 띠던 야자수나무, 한 걸음 떼기가 무섭게 등장하던 쇼핑몰과 음식점, 카페들. 편리함을 다 갖춘 도시 하나가 아름다운 자연 한복판에 그대로 존재하는데 교통체증은 없고 심지어 반려동물까지 환영이라니. 흔히들 말하는 살인적인 집값과 노숙자 문제만 해결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지만 오아후, 너는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