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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향 May 28. 2024

오아후섬에서 라나이섬으로

라나이, 마우이섬 옆의 어느 작은 섬마을

'하와이' 하면 기껏해야 호놀룰루랑 와이키키나 떠올렸지 오아후나 마우이 같은 섬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오아후에 직접 여행을 가기 전까진 그랬다. 부끄럽지만 평소 워낙 바깥세상에 관심이 잘 없다 보니 자연스레 남들에 비해 상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그러니 하와이 섬들 중에 크기로도, 인구로도 6등인 라나이라는 섬에 대해서는 알 리가 만무했다.


오아후섬에 집을 둔 친구네 가족이 주말에 라나이섬으로 놀러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수영을 할 거라고 해서 수영복을 챙겼다. 여행 당일, 스노클 장비를 잔뜩 챙긴 친구 가족과 호놀룰루 공항으로 갔다. 메인 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모쿨렐레 항공(Mokulele Airlines) 터미널로 갔다. 라나이로 가는 직항 편이 하루에 적어도 5번은 넘게 있는 것 같았다. 비행시간은 약 30분, 가격은 편도 $100 정도였다.


창구에서 표를 구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석이 10개 안팎인 경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작고 허술한 비행기는 타본 적이 없어서 하늘에 떠있는 내내 내가 과연 안전한 건지에 대해 물음표를 잔뜩 던지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라나이에 도착해 있었다. 착륙 전 높지 않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니 공항을 나오고 나니 더 가관이었다. 웬 길게 뻗은 소나무만 가득하고 사람이랄지, 건물이랄지, 뭐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오아후 (좌) / 라나이 (우)

기가 막혀서 친구에게 물어보니 라나이는 인구 단 3,000명이 사는 작은 섬마을이더랬다. 병원, 주유소, 경찰서, 학교가 각각 1곳씩밖에 없는 작디작은 마을이란다. 미리 알았더라면, 음... 안 따라가겠다고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와버렸으니 후회해도 늦었다. 친구는 결혼 전 라나이 포시즌스 리조트(Four Seasons Resort Lanai)에 있는 마넬레 골프장(Manele Golf Course)에서 8년인가 일을 했단다. 덕분에 라나이에 아직 친구들이 많아서 우리는 숙소를 예약하는 대신 내 친구의 친구네 집에 방 두 개를 빌려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사나흘밖에 안 있었는데 서울에서 자란 나는 휑한 라나이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서 여행기간이 마치 열흘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트도 있고 식당이랑 카페도 있고 있을 건 나름 다 있지만서도 어딘지 모르게 원시적인 냄새가 나서 좀 낯설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길 가다가 자주 눈에 띄던 야생 사슴들을 보면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연경치도 굉장히 아름다워서 있는 내내 눈이 즐겁긴 했다.

첫째 날에는 코엘레 마구간(Stables at Koele)에 가서 말 구경을 했다. 친구네 가족이 승마를 하고 싶대서 따라간 거였는데 나는 말에 타고 싶지 않아서 안 탔다. 남들은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서 못한다는 골프, 승마, 사격 등의 액티비티가 내 주위에는 널려 있는데도 나는 참 한결같이 관심이 없다. 미국에 살면서 왜 안 누리고 사냐는 친구들의 타박에도 꿋꿋하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좋은 걸 굳이 직접 다 경험해 봐야 한다는 욕심이 안 생겨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날에는 포시즌스 리조트에 들렀다가 훌로포에 만(Hulopoe Bay)에 가서 수영을 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친구들이 스노클링을 하는 동안 모래사장에 누워서 햇빛을 즐겼다. 챙겨간 망고를 깎아 먹고 과자도 까먹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포시즌스 리조트 주변이 엄청 아름다웠는데, 아무도 모르는 섬에 있는 것 치고는 로비도 그렇고 골프장도 그렇고 너무 잘 되어 있길래 궁금해져서 찾아봤더니 1박 숙박비가 무려 $2,000이 넘더라. 


그래서 나중에 알게 됐다. 라나이가 세계 부자 10위 안에 드는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개인 소유의 섬이라는 것도, 사생활을 중시하는 재벌이나 유명인들이 즐겨 찾는 비밀 휴양지라는 것도, 한 때 전 세계 파인애플의 75% 이상을 생산해서 '파인애플 섬'이라고 불렸다는 것도. 사실 친구가 옆에서 자랑하듯 계속 떠들었었는데 내가 한 귀로 듣고 흘린 거였다. 그러고는 뒷북을 치듯 구글에 검색을 하고는 화들짝 놀란 나, 팩트 체크한 셈 치지 뭐.


셋째 날에는 자동차 타이어가 터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할 만큼 울퉁불퉁 험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신들의 정원(Garden of the Gods)으로 갔다. 도착하니 커다란 바위들이 많았고, 바위를 옮기거나 쌓지 말라는 경고 표지만이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가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사진을 좀 찍으려는데 몰아치는 바람이 너무 셌다. 몸이 휘청이는 와중에 '이래서 바람에 날아갈 듯하다는 표현이 나왔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는 라나이 친구들과 다 같이 로컬들만 안다는 어느 한적한 바닷가로 갔다. 워낙 할 게 없는 작은 섬이라서 그룹 바비큐를 매 주말마다 한다고 했다. 바닷가 뒤편의 비밀스러운 아지트에 도착하고 보니 그들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곳엔 이미 해먹과 식탁, 의자, 그릴 등이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그 공간에서 내가 해먹에 누워 농땡이를 피우는 동안 친구들은 전부 커다란 오리발을 끼고 바다 사냥을 나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이름 모를 물살이와 랍스터를 잔뜩 잡아서는 금세 그릴에 뚝딱 구워 내왔다. 야생, 원초, 원시, 자연 따위의 키워드가 마구 생각나는 밤이었다. 


신호등이 없는 매력적인 섬이지만 모든 게 색다르고 불편해서 있는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겠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던 라나이, 지나고 보니 기억에 많이 남는다. 눈에 보이는 절대적인 사람 수가 적으니 사실 마음이 편안해야 맞는 건데 아무래도 내 가족이 아닌 낯선 라나이 친구들과 같이 지냈다 보니 오히려 불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번에는 내 가족과 방문하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라나이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믿고, 앞으로도 자연을 잘 지켜주면 좋겠다는 바람만 간직해 본다.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어 고맙다, 라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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