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
한국에서 가족들이 놀러 왔다. 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 집 멍뭉이 체코는 곧 6살이 된다. 그러니 우리 가족들은 체코를 이번에 처음 만났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엄마는 체코한테 그랬다. “잘 있어, 체코. 이제 가면 또 언제 보겠니. 너 살아있는 동안에 다시 보기는 어렵겠지. “
맞는 말이다. 나야 한국에 2-3년에 한 번 정도 들어가기야 하겠지만 체코를 국제선 비행기에 태워서 날아가는 건 보통 결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번에 연습 삼아 워싱턴 DC 여행 때 델타 국내선으로 데려갔었는데 2시간 안 되는 그 짧은 비행에도 스트레스받아하는 체코를 달래주는 데에 온 신경을 다 소진했었더란다. 여러 정황상 내가 한국에 들어갈 때 체코가 같이 가기는 어려울 거다. 그리고 엄마가 나를 보러 다시 미국에 나오려면 이다음에도 8년 정도 걸릴지 누가 아는가.
어쨌건 인간보다 훨씬 수명이 짧은 체코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서 체코가 언젠가 나를 먼저 떠날 거라는 생각이 한 번씩 나를 압도하는 때가 생겼다. 벌써 너무 슬프고 두려워서 이런 생각은 일부러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고 살았다. 근데 엄마 말을 듣고 보니 참… 개 수명은 어쩜 이렇게 짧은 걸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드는 게, 금방 또 슬퍼질 거 같아서 “뭘 그렇게까지 얘기를 해.” 하고 말았다.
엄마랑 같이 놀러 온 우리 둘째 이모는 또 이런 소리를 한다. “너 엄마 볼 날 며칠 없다. 이렇게 몇 년에 한 번 겨우 보고 사는데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렇게 같이 지내는 날이 있을 거 같애. ” 엄마도 맞장구쳤다. “그럼. 그래서 이 시간이 엄청 소중한 거야. ” 그 말은 바로 나를 울렸다. 앞에서는 ”아 왜 그런 소리를 해. “ 하고 큰 인형 뒤에 숨어 버렸지만 그 뒤에서는 목이 잠긴 채로 한참을 소리 죽여 눈물 흘렸다. 엄마랑 이모도 돌아보면 할머니랑 같이 지낸 시간이 별로 없다고. 어렸을 때나 한 지붕 아래 살았지, 직장 다니고 결혼하고 하면서부터는 각자 새로 생긴 가족 챙기고 사느라 할머니랑은 얼마 못 보고 금세 돌아가셨단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날 태연한 표정으로, “나 이제 고아야.” 했던 말이. 어렸을 때는 친구가 너무 좋아서 집 밖으로만 나돌았었는데 이제 와서는 왜 그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부모님이랑 같이 살 날이 얼마 없는 줄 알았으면 말 그대로 있을 때 잘 좀 할걸. 청춘을 다 바쳐서 놀았다고 자부했고 후회는 없다고 믿어왔건만. 바닷속 손아귀에 쥔 모래알처럼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이 이렇게 야속했던 적이 있는가 싶다.
엄마랑 둘째 이모는 40일만 머물고 큰 이모는 60일을 머물다 가기로 했다. 나는 큰 이모와 좀 각별한 사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일 다닐 때 이모 손에서 자란 시간이 제법 있어서 그런가 나이 차이가 적지 않은데도 우리는 친구처럼 가깝다. 이모는 언제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고, 엄마 아빠가 잘 안 사주던 맛있는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사줬고, 뭐만 하면 잘했다 이쁘다 우쭈쭈 칭찬 일색이었다. 같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고 연애상담까지 해주던 철없는 우리 이모가 어느덧 한국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7년 전에 일본 후쿠오카에 큰 이모랑 같이 온천 여행을 갔었다. 그때 이모는 나랑 하는 물놀이가 마지막일 줄 알았나 보다. 이번에 플로리다에 놀러 왔으니 바다도 가고 야외수영장도 같이 가서 수영을 했다. 그랬더니 큰 이모는 또 이런다. ”지난번 수영이 마지막일 줄 알았더니 이번에 이렇게 또 수영을 같이 하게 되네. 마지막을 한 번 연장한 기분이네. ” 이 아줌마들 단체로 나를 슬프게 만들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어쩜 이렇게 다들 속상한 이야기만 골라서 하는지.
그래 나도 안다. 시간은 빠르고 우리는 언젠가 모두 헤어지게 된다는 걸. 엄마랑 이모들을 공항에 픽업 가는 길에서부터도 이미 알았다. 이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흐를 거고 나는 이들과의 헤어짐 후에 분명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슬픔을 겪어내야 할 거라고. 알고 있었어도 별 수 없다. 만남 뒤에 따라오는 이 헤어짐은 늘 아리다. 미국으로 떠나고 싶어 한 건 난데. 다 내가 선택한 건데도 한 번씩 이렇게 이별을 마주할 때면 먹먹한 감정이 정말 무겁게도 나를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