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혜린 Oct 23. 2024

당신의 순수

2021 실천문학 가을호 수록




* 출판 잡지에 수록된 글인 관계로, 전문이 아닌 일부분만 발췌해서 공개합니다.



* 자신만의 신념으로 독특한 향수를 만들고자 하는 조향사 이야기로서, 유명 인사를 모델로 향수를 만드는 일을 통해 '순수'라는 개념을 고민해 보게 하는 작품입니다.












  오늘 오전 회의에서 김 차장은 ‘한국을 빛낸 향에 물들다 - 설립자 향 시리즈’ 프로젝트를 선포했다.

  “북 퍼퓸 알지? 그것처럼 기업이나 단체의 설립자들을 상징하는 향수를 만드는 거야.”

  김 차장은 프로젝트를 한번 맡으면 회사 구석에 있는 라꾸라꾸를 비워 두지 않게 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내년 상반기 프로젝트를 위해 처음 열린 회의 자리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다들 김 차장이 이번에도 지휘관이 되었다는 데 한숨부터 쉬었다. 팀원은 다섯 명이었다. 기획 팀 이 사원, 마케팅 팀 김 대리와 박 과장은 공포 영화를 봤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가 눈썹은 위로, 입술은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향료 팀 대표 연구원인 진설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를 원했지만 프로젝트라는 건 단기간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한 거였다. 낭떠러지를 클라이밍하거나 산을 향해 높이뛰기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반기에 실패했던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아이를 위한 ‘내추럴 향수 프로젝트’ 때에도 시험 대상으로 팀원들의 자식들이 얼마나 많이 소환되었던가. 품평회에서는 시판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바닐린과 에틸 말톨로 만든 솜사탕 향이 성장에 안 좋은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솜사탕 향이 난다고 해서 향수를 먹을 건 아니지만, 유해 성분을 최대한 안 넣는다고 해도 아이는 향수를 안 쓰는 게 좋았다. 첫 회의 때 그 얘기를 했지만 김 차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진설은 연구실에서 합성 향료를 조합하면서 이번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회사가 중소기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던 김 차장의 말을 곱씹었다. 향이 완성되었을 때는 김 차장에게 안정성을 고려했다는 말과 함께 샘플 시안을 냈다. 그 뒤에 품평회에서 키즈 향수를 패브리즈로 착각하게 하기 위한 말을 지어내는 김 차장을 묵묵히 바라보았었다.

  하지 못한 말은 까맣게 고여 갔다.








  진설은 구글에서 김세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보라색 정장을 입은 사진이 연달아 떴다. 문서 제목들을 살펴보았다. 팔 페이지쯤 넘어가자 변방의 블로그에 ‘김세인의 씌어지지 않은 주석’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이 보였다. 그 글을 클릭했다. 본문 내용은 따로 없고 비밀 댓글을 단 사람에게만 내용을 알려 준다고 나와 있었다. 진설은 김세인에 대한 향수를 기획하고 있는데 중요한 내용 같아 알고 싶다고 비밀 댓글을 남겼다. 그 글에는 댓글이 서너 개 있었지만 대부분 비공개였다. 그중 한 댓글만 공개되어 있었다. 소설 쓰고 있네.

  김세인을 위한 향수를 만들기 위해 향료를 조합하는 일이야말로 소설 쓰는 일 같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하필이면 영상 통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숯불 위에 올라간 고기와 소시지, 버섯이 휴대폰 화면을 채웠다.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조명이 어두워서 고기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이 조금 멀어졌다. 김 차장 뒤에서 집게와 가위를 들고 있는 이 사원, 소맥을 말고 있는 김 대리, 버섯을 새로 올리고 있는 박 과장이 보였다. 동아리 사람들끼리 엠티라도 간 것 같았다. 숯불처럼 훈훈했다. 점심시간에도 그들은 그런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김 차장 외의 사람들이 웃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숯불 위에 있는 고기를 부지런히 집어 먹었다. 화면이 휙 돌아가더니 벌게진 얼굴로 소맥 잔을 들고 있는 김 차장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김 차장은 진설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얘기 다 끝났어! 부럽지?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네, 그렇네요.”

  “경치 좋은 곳에 오니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르더라니까. 라벤더! 라벤더 향으로 가는 거야! 김세인이 보라색 정장만 입잖아? 고귀해 보이는 보라색이 자선 사업 하는 설립자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고.”

  진설은 다른 생각을 했다. 라벤더는 해충을 쫓는 식물이었다. 사진 속에서 봤던 아이의 눈도 떠올랐다. 보랏빛 눈이었다. 라벤더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이기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향은 아무래도 좀…….”

   “그래, 그래. 결정은 송 연구원이 해야지. 그래도 연구할 때 참고 좀 해 줘. 아, ‘모두의 친구’가 별명이니까 제비꽃도 좋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둘 중 하나로 가면 어때? 샘플도 최대한 빨리 만들어 주면 좋고."








  진설은 다시 숨을 들이켰다. 레몬 타르트의 향이 진하게 났다. 김 차장의 PT가 끝나 가고 있었다. 이제 진설의 차례였다. 진설은 샘플 향수를 가지고 앞으로 나갔다. 샘플 향수를 본 김 차장의 눈이 커졌다.

  “송 연구원, 회의 때 보여 준 것과 다르잖아? 색이 왜 보라색이 아니고 흰색이야?”

  진설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김 차장 쪽으로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사장을 쳐다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세인은 모두의 친구도 아니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도 아닙니다. 좋게 말하면 장사꾼이고, 솔직히 말하면 사기꾼이죠.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향을 만들었습니다. 함부로 퍼져도 되는 향을요.”

  포크를 레몬 타르트 쪽으로 가져가던 사장이 고개를 들어 진설을 보았다. 진설의 말 때문인지, 레몬 타르트를 먹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입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진설과 사장의 눈이 마주쳤다. 진설은 사장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김 차장이 으르렁거리듯이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송 연구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잊었어?”

  “알아요.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김 차장이 진설의 오른쪽 팔을 붙들었다. 진설은 그 팔을 뿌리쳤다. 사장이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진설은 김 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으로 향을 만들 수는 없잖아요?”








  쉬는 시간이 되자 진설은 제일 먼저 대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육중한 문이 큰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화장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 걸음도 옮기지 않았는데 대회의실 안에서 목소리들이 들렸다. 시작은 역시나 예상대로 목소리까지 큰 김 차장이었다.

   “아, 삼별초 또 출동했네.”

   “삼별초요? 저 알아요! 한국사 시험공부할 때 미친 듯이 외웠는데……. 몽고가 침략했을 때 막기 위한 용사…….”

   “이 사원, 여기서 몽고 얘기가 왜 나와?”

   “그러면요?”

   “송 연구원 얘기잖아. 송 연구원 별명이야, 삼별초. 새삼 별나게 초 친다고.”

   “아하!”

   “왜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해야 하는 것만 하면 서로 편하고 좋잖아. 분위기 싸늘하게 만드는 데는 제일이라니까.”

  진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얘기를 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화장실에 가기까지의 걸음 시간을 세 보면 안 되는 건가. 자신에게 그런 별명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요새 말을 줄여서 하는 게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즐겁지 않은 말이었다.

  진설은 화장실 칸막이에 들어갔다. 두 칸밖에 없어 오래 있으면 눈치가 보이는 자리였다. 지금은 모습을 숨기는 게 더 중요했다. 칸막이 안에서 쉬는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정확히 십 분이 지난 뒤 대회의실로 들어갔다. 사장은 양손으로 깍지를 낀 채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김 차장은 진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설이 아까 가지고 나갔던 샘플 향수는 뚜껑이 열린 채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진설은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김 차장 쪽으로 돌렸다. 김 차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외쳤다.

  “새 향수의 이름은 ‘벌거벗은 임금님’입니다. 부제는 착한 사람만 맡을 수 있는 향기구요.”

  착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향기를 맡는 이의 상상에 맡기면 될 일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을 보지 않고 대회의실을 나왔다. 그 향이 어떻게 조합되었는지는 아무 곳에도 남기지 않았다. 오직 진설의 머릿속에만 있는 그 조합은 영원히 비밀이었다. 진설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참지 못한 웃음이 계속 비어져 나왔다.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벌거벗었다는 이야기를 한 아이처럼, 속이 후련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극성의 사랑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