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영국 영어에 물들다

지금 나의 억양은?

by 링고빙고 LingoBingo

결혼을 하고 배우자 비자를 받아 영국에 왔다.

나는 북미 영어에 한껏 물든, 말 그대로 우물 안 북미 개구리였다.

해외 경험이라고 해봐야 다 미국·캐나다였고, 내 세상에서 영어는 곧 “미국식 영어”였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식 버터 발음 아니면 왠지 “구린 영어” 같았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 유창한 미국식 억양이 아니면 이상한 영어라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남편을 따라 처음 정착한 곳은 영국 북부의 Middlesbrough.

여기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사투리 심하다고 소문난 동네다.

미국 드라마에서도 지역 사투리가 있고 종종 언급이 되는데 (미국 남부쪽 사투리) 표준 미국어(?) 와 그렇게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안그래도 영국 영어는 낯선데, 영국 지역 사투리를 들으니 나의 영어 실력에 물음표가 붙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유색인종이 많이 없는 찐 백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기도 해서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영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식당에서 미국식 영어로 아주 당당하게 "워러"를 달라고 했는데 웨이터가 말을 못 알아 듣는것이 아닌가!

외국어로 말해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내 말이 안 통할 때, 그 짧은 순간에 자존감이 얼마나 쪼그라드는지를...

상대가 내 말을 못 알아 들어서 계속 pardon? excuse me? 하면 얼마나 위축이 되는지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영국 식으로 워"터" 를 달라고 했더니 알아듣고 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일들을 몇번 겪고나니 나의 억양도 자연스럽게 영국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워터라고 하면 워터라고 안 할 재간이 없다.


water 는 위의 에피소드 때문에 애진작 바뀌었고, can't 도 캔트가 아닌 칸트, not at all 은 나랫롤이 아닌 놋애톨 등등 t 발음은 아주 확실하게 티읕 발음을 해준다.

나에게 한국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스카이'카'슬 이었다.

여기 오래 살았지만 어릴 때 접한 미국식 발음도 섞여 있어서 (특히 r 발음) 나의 영어 발음은 미국식, 영국식, 그렇다고 한국식도 아닌 이민자의 발음이 되었다.

지금은 런던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런던은 워낙 이민지가 많은 도시라 서로의 억양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 소통을 한다.


영국에 와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인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하고 비즈니스를 한다.

국적만큼 다양한 억양들도 많이 흥미롭다.

각 나라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는 더이상 "구린 영어"가 아니라 그 나라의 정체성이 담긴 매력 포인트이다.

철없던 20대의 나는 완벽한 발음과 억양으로 영어를 해야 잘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식이든, 영국식이든, 한국식이든,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건넬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내가 가진 최고의 영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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