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을 미담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
미담에 기대는 사회
나는 미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미담이 갖는 따뜻하고 뭉근한 분위기를 싫어한다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잘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 대신 '미담으로 가득 찬 따뜻한 사회'라는 말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 묻혀버리는 것을 싫어한다. 미담은 제도권 안에서 정책적으로 잘 보장해주면 생기지도 않았을 불편함을 어느 개인의 봉사와 배려로 치환하여 덮어버린다. 그렇게 특별한 일은 미담이 되고 일상처럼 공유된다.
미담이 널리 퍼질 수 있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미담을 좋아하고 또 공유를 통해 여기저기 퍼뜨린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동받아서 이 감동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한 켠에는 미담의 주인공, 그러니까 미담에서 도움을 받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과 도와주는 입장과 나를 동일시하는 우월감 그리고 내가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도왔으니 괜찮다는 무관함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나는 차가운 도시 아줌마
미담에 눈물 지으면서도 세금을 더 내자는 말에는 발끈한다. 당장 나한테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엉뚱한데 쓰느라 돈이 부족한 거라며 화를 버럭 내기도 한다. 미담을 여러 단톡방에 공유하면서도 내 아이가 학교에서 장애인 통합 교육을 받는 것에는 반대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면서도 역차별을 운운하며 세상의 모든 합리적인 기준이 내 아이에 맞춰져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미담이 그저 미담으로 존재할 때 나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 미담은 그저 미담으로 남을 수밖에.
미담에 등장하는 장애인
오래전 어느 단톡방에서 발달장애인 아이가 학교에서 난동을 부렸는데 그걸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숙제나 물건 챙기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발달장애인 학생이 작은 선물을 하나 줬다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진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미담에 눈물을 흘렸다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장애인 앞에 '발달'이 붙은 이유는 발달이 더디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상인처럼 감사를 표현한다는 것은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내가 라흐마니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수려하게 치는 것에 비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학습 보조인이나 교사의 도움은 필수적일 테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야 할 급우를 돕는 일은 당연하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니니 많은 학교에서 불편한 급우를 돕는 학생들에게는 상점제를 운영하여 많은 점수를 준다.
우리 집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도 상점 기준표에 이를 명시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산하 A교육지원청 소속)
그런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다면 미담에 눈물 흘려야 할 것이 아니라 왜 발달장애인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왜 발달장애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담으로 돌아다니는 일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도움을 받고도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우리는 무례하다고 판단해야 할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선의에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발달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들은 무례한 것이 아니라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럼 부모라도 달려와서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우리는 차별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늘 고맙다고 말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국가적 지원은 미비하고 관련 학교도 부족한 데다 중증 발달장애인의 집에 자진해서 가려는 복지사의 수는 많지 않다. 장애인 아이를 둔 가정은 정 나눔에 감사해야 할 만큼 여유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발달장애학생의 가정이라고 특별히 다를 리가 없겠지. 이런 부분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는 '고마워'라는 말조차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발달장애인 미담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미담이 장애통합교육 강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주변에서 미담을 퍼뜨리는 사람들 중에는 통합교육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는 점이 나를 힘들게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스크린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미담의 주인공은 미담 안에만 갇혀있어야 하는 것일까.
핀셋 수용도 확대 해석하게 만드는 미담
최근에 BTS가 수어를 안무에 활용하고 무대에 수어 통역사를 세우는 등 장애인 팬들을 위한 행보가 화제가 되고 있다. 농인 팬들을 위한 배려로 아름답게 신문을 장식했는데 정말 이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일까. 비장애인의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장애인의 하루는 16시간이라고 말하는 협동조합 무의의 홍윤희 이사장은 개인 SNS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좌석이 휠체어로 접근 가능하다면 그냥 비장애인 팬들과 티켓 전쟁을 벌여도 되는데, 휠체어 접근 가능한 좌석이 몇 개 안된다. 잠실체육관 같은 곳도 휠체어 좌석이 몇 개 안 된다. 화장실을 간다던지 하여 활동 지원인이랑 같이 가야 하면 두 좌석을 구해야 한다. 즉 장애인들은 비장애인에 비해 10배 20배 더 어려운 경쟁이다. 이게 공정인가? 티켓 전쟁을 똑같이 하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마침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하이브의 BTS 관련 전시회에 농인 관객과 수어 통역사 동시 입장이 가능해졌다는 내용. 주목할 점은 하이브가 직접 자진해서 결정한 게 아니라 아미들이 요구를 한 후에나 응답을 했다는 것.
공연에서 휠체어 접근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 없다. 그래서 아티스트가 소속된 엔터테인먼트사는 공연 장애인 접근성에 있어서 완전 갑일 수밖에 없다. 특히 휠체어 좌석이 갖춰진 대형 공연장의 경우엔 기획사 마인드가 어떤가에 따라 휠체어석이 풀리기도 하고 안 풀리기도 한다. 팬들이 아우성을 쳐서 기획사에 항의해야만 찔끔 접근성을 약간 열어주는 마인드셋이라니...
BTS 정국이 프랑스에서 휠체어 팬에게 하이파이브해줬다는 미담 기사가 2019년엔가 실렸는데 한국 BTS공연엔 휠체어 팬이 아예 들어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게 해 놓은 셈.
(관련기사는 내가 별도로 링크)
같은 장애인이라도 장애가 있는 부위나 정도가 다 다를 텐데 어떤 장애는 미담으로 소개되고 어떤 장애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같은 장애라도 상황에 따라 존중되기도 하고 유령처럼 대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실행 지침이 없으니 그 많은 미담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선별적으로 차별을 받게 된다. 이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을 차별이라고 해야 하나.
미담보다는 정책
연푸른 님과 은승채 님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관한 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컸다. 잘 정비된 도심 한복판이나 새롭게 지어진 빌딩에는 가족 화장실이나 가족 휴게실이 존재한다. 어린아이를 비롯한 노약자 및 장애인을 동반한 보호자라면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뒤집어 말해보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화장실은 그만큼 가족이 이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가족 화장실이 특별하고 화제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가족 화장실이 있으니 일반 화장실에는 요구하지 말아 달라는 뉘앙스로도 볼 수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특별한 화장실보다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평범한 사례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이가 공공화장실을 안전하고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런 점에서 성공회대의 이야기가 특별한 사례로 남는 대신 후속 사례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동권 확대나 화장실 사용의 문턱을 낮추는 일은 장애인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약자들 그리고 약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홍윤희 님의 말씀대로 안경을 쓰면 시력 나쁜 사람도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모든 사회적 시설이 안경처럼 갖춰져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미담이 미담으로 존재하며 확산되기보다는 미담을 바탕으로 정책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고작 미담으로 만족하며 불평등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가지면 좋겠다. 미담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피곤한 삶 대신 아무도 미담의 주인공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누구나 미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서 불안한 사회보다는 무미건조하게 미담 따위 없어도 누구나 편안하게 화장실 가고 즐겁게 공연 관람하는 세상을 나는 더 좋아한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