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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은 Mar 27. 2022

대한민국에서 중산층 전업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득권으로 분류되면서도 천대받는 기이한 삶


서울에 거주하는 다주택자


나는 때때로 기득권으로 불리지만 기득권으로의 삶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종부세를 낸다는 말만으로도 차별의 대상이 되며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것이 분노의 화살을 맞아야 할 이유라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고학력자이며 전업주부인 나는 고학력 고연봉 배우자와 함께 아들과 딸을 돌보며 산다. 아파트를 포함한 여러 부동산을 갖고 있는 다주택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꽃을 좋아하고 어떤 봉사활동을 하는지 묻지 않는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가진 부동산의 위치와 시세 그리고 관련 세금에는 과할 정도로 관심이 많다. 공동명의인지 단독명의로 소유하고 있는지도 매우 궁금해한다.


의아한 것은 부동산에는 관심이 많지만 우리 부부가 어떻게 자산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오로지 현재 가지고 있는 부동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남편이 잘 벌어와서 놀고먹는 상팔자


‘왜 집에 있어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번도 저 질문을 건너뛴 해가 없었다. 일을 그만둔 이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했다. 살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재능이 집안일이라는 것을 아무리 친절하게 말해줘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가 돌봄 노동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측정하지 않으니 전업주부의 노동력은 재고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그저 결혼 잘해서 팔자 핀 한량이 될 수밖에. 배우자의 본가보다 나의 본가가 더 잘 살고 자산형성에 내가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은 남자인 배우자에게 돌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왜 그 꿈에 좋은 살림 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법인을 차리고 대단한 기업가가 되거나 자격증을 따야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하는 일의 가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그에 대한 존중은커녕 일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오늘도 그저 팔자 좋은 아줌마가 되어버린다.

 

운전도 안 배우고 뭐했나


불법도 탈세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적폐가 되어버린 다주택자는 15년 동안 차를 사지 않았다. 15년 동안 입는 옷은 장롱 2자를 넘지 않았다. 처음엔 장롱 1자를 넉넉하게 쓸 정도였는데 아이들이 태어나니 4 식구의 옷은 장롱 2자의 70% 정도를 차지했다. 가계경제를 걱정하면서도 쇼핑몰에서 대량 구매를 즐겨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삶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에서 소비를 제한하고 불편함을 즐기며 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입을 떼게 된다. 하지만 차가 없다는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아니 운전도 안 배우고 뭐했어?’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맥락은 흩어지고 팔자 좋고 게으른 무면허 아줌마만 남는다.


차 없이 살 생각인데 꼭 운전을 배워야 하나?

장롱에 던져두더라도 꼭 따야 하는 것이 운전면허인 건가? 왜? 돈 아깝게.

선택에 불과한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다고 나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울컥한다. 교육비를 대줄 것도 아니면서 왜 함부로 따라마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중산층을 부동산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그리고 비올리스트는 리차드 용재 오닐을 좋아한다. 윤동주 같은 시인도 좋아하고 오에 겐자부로나 박완서도 좋아한다. 마르케스나 귄터 그라스의 책도 즐겨보는 편이다. 마티스와 모딜리아니를 좋아하고 여행을 가면 지역 미술관과 공연장 정도는 방문하려고 노력한다. 방짜유기와 팬톤 컬러로 재해석한 현대식 칠기를 좋아하며 베르나르도와 웨지우드도 즐겨 쓴다. 수입의 30%는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정기적으로 기부를 한다.


그런데 세간에 오르내리는 중산층은 마치 탐욕스러운 괴물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닌데 중산층을 부동산으로만 이야기하는 기사를 보면 피곤해진다.


너는 참 복도 많구나


상속받은 부동산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넌 참 복도 많아. 어떻게 요즘 같은 시기에 부동산을 물려받았어. 부럽다. 네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니’라고 말한다.


상속을 받았다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병으로 돌아가셨고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부동산으로 슬픔을 잊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몇 번이라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이런 관점에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행동을 이해하고 또 공감한다. 보상금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아이들과 등가 교환되지 못한다. 돈은 슬픔을 잠재울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복이 많은 것일까, 복이 없는 것일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중산층


이쪽으로 가면 돈도 많으면서 왜 이쪽으로 왔냐고 비아냥대고 무시한다. 저쪽으로 가면 가진 것도 별로 없고 힘도 없는데 감히 뭘 바라고 이곳으로 왔느냐고 한다.


중산층에 전업주부 프로필을 더하면 맞벌이를 위해 존재하는 학교의 선별복지혜택은 넘볼 수조차 없다. 맞벌이 가정의 돌봄 혜택이 전업 주부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까지는 바라지도 않겠다. ‘전업주부인 주제에 돌봄 혜택까지 바라다니 어이가 없다’라는 식의 비난만이라도 멈춰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난지원금이 5차까지 나왔다는데 1차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안 받아도 될 상황이라는 것에 감사하라는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세금을 내면서도 2-5차 재난지원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똑같은 두께의 지갑으로 무섭게 치솟은 물가를 감당해야 했던 중산층의 희생에 공감하는 누군가가 한 명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배려와 연대를 꿈꾸는 것은 망상일까


나누고 양보하며 슬플 때 위로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나보다 더 많이 가졌다며 분노하고 질투하기보다는 많이 가진 사람이 사회에 더 내놓을 수 있는 분위기에서 연대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딸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아이 중에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아파트에 거주하는 아이가 있다. 둘은 방과 후 학교에서 놀다가 집에 바래다주는 놀이를 하며 헤어진다고 한다. 3학년 아이들이 걷기엔 조금 먼 거리인데 늘 딸이 친구를 데려다주고 온다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스마트폰이 있어서 길을 잃어버리면 엄마한테 전화하면 되는데 친구는 전화기도 없으니까 당연히 내가 데려다줘야지.”


불행하게도(?) 이 눈물겹고 아름다운 동행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안전하고 차별 없는 등하교를 위해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거주하는 동네를 거의 대부분 포함하는 스쿨버스 노선을 만들었고 곧 운행할 예정이다. 적지 않은 규모의 구청 예산이 들어갔다. 아이들의 안전을 중요시 여기는 보호자들의 민원과 부모의 차량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평등 논란으로 고민하던 학교 선생님들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공공임대에 살아도, 5억짜리 빌라에 살아도, 30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자가나 전월세에 관계없이 함께 스쿨버스를 타고 재잘거리며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겠지.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은 좀 섞여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 몰이해와 무관용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구원할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섞여서 지지고 볶다가 화해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중산층 전업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득권으로 분류되면서도 천대받는 기이한 삶을 살아가지만 보편복지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할 각오로 절약하며 사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이 중산층이다.


내 이웃의 아이가 행복해야 결국 내 아이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만큼 수준이 높다. 오르기만 하는 세금과 물가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봉사와 기부는 내려놓을 수 없고 고작 부동산이나 자동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정도로 교양 있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중산층 전업주부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중산층


좀 더 많은 중산층이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중산층이 얼마나 괜찮은 집단인지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중산층을 부동산 정책의 프로파간다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서도 비난하는 대신 그저 조금 운이 좋아서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중산층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말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공동자산 형성을 위한 세금 납부에 긍정적일 때 상향평준화 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적어도 전방위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살면서 상류층보다 못한 삶이라 자조하며 나눔에 인색한 것보다야 열 배는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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