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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홈은 Mar 16. 2022

또 다른 학교폭력, 사이버불링

늘 부지런한 악에 관하여,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


'지옥'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본 소년심판과 함께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온 작품이었다. 신흥 종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한 드라마였는데 거기에 유튜브로 피해자를 지목하고 달려가서 폭행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러 명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로 저런 세상이면 무서워서 자기 의견 말하고 살 수가 있겠나 싶었는데 그런 일이 드라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감정에 못 이겨 화를 내는 순간이 다가오곤 한다.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거나 울고 물건을 던져서 해결이 된다면 그러겠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하다. 해결이 안 된 분노는 약한 아이에게로 흐르게 된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말이다. 순간순간의 해방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죄책감이 보호자를 잠식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어떤 스트레스 해소의 감정을 느낀다면 회를 거듭할수록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자신의 도덕성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잔혹해지지 않을까. 각각의 분노를 드러내는 방식에 이유를 덧붙여가며 자기 합리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잔인한 행동이나 말을 하고도 그것이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가정폭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뜬금없이 가정폭력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가정폭력에서 보통 피해자는 가장 어린 존재이거나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폭력으로 발산될 때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노약자나 신체적 약자가 아닐까. 육체적 폭력이 그럴진대 정신적 폭력이라고 크게 다를까 싶다.


내 알 바 아니니까


사이버 렉카들이 분위기를 조장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인터넷이라는 가림막 뒤에서 자신을 숨긴 상태에서 웃고 떠들며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자를 공격하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른 부분에서 화가 났는데 상대적 약자로 보이는 공격하기 좋은 사람, 공격할 명분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행동할까.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익명성 안에서 내가 보호되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까. 


장난처럼 댓글로 욕을 한 번 써보겠지. 처음엔 조금 떨리거나 걱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용기 내서 휘리릭 달아버릴지도 모른다. 큰 문제가 생기지 않고 상대방이 화내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기분에 가학적 즐거움을 느끼며 한 번 더, 이번에는 더 길게, 그다음에는 문장으로.


피해자가 아무리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꼈다고 표현해도 글쎄 신경이나 쓸까. 피가 흘러서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내 일도 아니니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저기 밑에 나처럼 댓글을 다는 사람이 또 있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신나게 비아냥거리고 욕을 하고 가는 걸 보니 또 욕이 하고 싶어 지는 거야. 그래서 함께 달려들어 욕을 하기 시작하지. 쾌감은 두 배가 되었는데 피해자가 자살시도를 했다는 이야기에 더 흥분되기도 하겠지. 신이 된 것 같지 않을까. 고작 키보드 하나로 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니. 다행히 나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지금 사용하는 계정은 들켜도 내 신분이 드러나지 않을 계정이라 큰 문제도 없을 것 같고 말이다. 완벽한 익명성이 주어져서 끌려갈 염려도 없고 좀비 게임 실사판처럼 손에 칼을 잡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게임머니 구걸하며 게임을 할 필요도 없다. 진짜 사람으로 하면 되는 일이니까.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가 되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지금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을 욕하고 궁지에 몰면서 느끼는 이 짜릿한 쾌감일 테니까. 


타인을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고 욕하며 얻어진 즐거움, 저 사람의 인생을 잘은 모르지만 나보다 꽤 괜찮게 사는 것 같은 사람이니 갑갑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펀치 몇 번 날렸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진 않겠지. 그러니 괜찮을 거야. 네가 더 잘 나가니 좀 맞아도 괜찮아. 어차피 진짜로 때리는 것도 아니고. 


두려운 미래


도덕성이나 수치심에는 역치가 존재할 것 같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는가. 매번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속에서도 평소에 내가 싫어하던 사람을 투영하며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즐거움을 알아버렸으니 딱 그만큼 도덕성에 대한 역치는 높아질 테지. 아무리 내가 나쁜 짓을 해도 스스로 생각하는 도덕성의 역치는 넘지 못하는 수준이니 괜찮다고 말하며 폭력을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가 성장한 후 사회에 나가는 순간이 큰 공포로 다가온다. 언젠가는 SNS를 사용할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텐데 조심스러운 경계와 믿음으로 시작해야 할 관계들이 결국 큰 상처로 남게 되면 그때는 어째야 하나 싶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피해자들이 자식같이 느껴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걱정이 신체적 변화를 야기하고 이렇게 나타난 신체적 변화는 더 우울한 상태를 끌어내는데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이 진행되는 그 느낌. 경험해본 사람이 나 말고도 어딘가에 있을 테지.


악보다 더 부지런하게


악은 항상 부지런하다.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악행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사회, 가정, 학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꾸준한 교육과 상담을 통해 화를 내는 방식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형태여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사람을 괴롭히는 행동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인지하고 만약 본인이 그런 상황이 되었을 경우를 가정하여 관련 감정을 파악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피해자의 괴로운 마음이 실체가 있는 통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혼자만 반복적으로 심리적 공격을 당하는 일이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할 것이다. 공격해야 할 당위성만 찾아내면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들개들처럼 달려들어 피해자의 인생을 무저갱으로 밀어 넣는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닌 사이버폭력


처음 코로나19가 시작되었을 때 옆동네에서 딸을 키우던 친구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했다. 온라인 학습 초창기라 선생님들이 별도의 수업 영상이나 실시간 비대면 수업보다는 유튜브 수업을 많이 선호하던 시기였는데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친구의 딸아이는 학교 아이들만 접속할 수 있도록 제한적으로 공개된 스트리밍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같은 학교 학생에게 악의적인 댓글을 받게 된다. 전 학년 아이들이 모두 참여하는 스트리밍이라 간간이 댓글로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며 방송을 보던 중에 친구의 딸아이에 대한 좋지 못한 헛소문을 담은 댓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측에서는 부랴부랴 댓글을 멈추고 범인을 찾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 아이디를 쓴 사람은 탈퇴하고 난 다음이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보고 있는 중에 실시간으로 아이의 모든 신상이 유출되고 모욕을 당한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는 그 충격으로 꽤 오랫동안 대인관계에서 움츠러들어 있었어야 했다. 보호자의 입장인 나와 친구들은 다른 의미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학생들이 모두 모이는 시간에 추적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댓글을 남기고는 학교가 반응하기도 전에 탈퇴를 하고 사라져 버린 일련의 과정에 공포감을 느꼈다. 공교롭게도 모두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었고 아이들의 연령대도 비슷했다. 고작 12년인데, 어떻게 살아야 저렇게 극악해질 수 있느냐고도 했다. 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테니 분명 사회와 보호자, 학교가 영향을 미쳤을 텐데 도대체 보호자인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괴물의 나이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 거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재미있어 보이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와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도대체 왜 폭력을 재미있다고 느끼게 되었을까. 


답이 보이지 않지만 노력이 필요할 때 


알랭 드 보통은 '아무 짓이나 저지를 수 있는 자유와 올바른 행동을 권장하는 자유'는 엄밀히 다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분이나 자기 검열 없이 자유를 남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관대할 텐데 이런 사람들을 꾸준히 설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을까. 설득의 결과물이 2022년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이것에 만족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까. 


타인에게 해를 가함으로써 쾌락을 얻는 사람들이 처벌을 강화한다고 해서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더 많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처벌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데도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피해자나 가해자가 애초부터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해당될 수 있음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학습해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중학생이 된 아들의 학교에서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의 일환으로 역할극 활동을 한다. 돌아가며 가해자와 피해자와 방관자 그리고 조력자의 역할을 맡으며 당사자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고 사이버폭력 교육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꽤 많은 학교에서 이런 역할극 활동과 캠페인,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폭력을 포함하여 사이버폭력에 대한 교육도 실시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이가 초등학교 때 받던 교육을 좀 더 심도 있게 진행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의 목적이 공부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 구성원 양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보호자들은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런 생각보다는 학교의 사이버폭력 교육에 적극 참여하여 더 이상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성과주의로 인한 피로감과 피폐해진 개인의 감정은 이제 그만 심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사회는 제도와 정책으로 범죄예방에 힘써야 할 것 같고 말이다. 타인을 해치며 얻어지는 감정이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은 그만큼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다양한 상담 프로그램을 지원하여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도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이미 자아가 강하게 형성된 사람들의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변할 수 있으니까. 

제대로 된 어른들이 옳은 방향을 보여주고 진짜 재미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면 충분히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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